SCOPUS
KCI우수등재
朝鮮 15ㆍ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 문헌자료와 요지출토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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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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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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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PUS,KCI우수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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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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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360(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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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도자기로서 등장한 청화백자는 15ㆍ16세기를 통해 외래적인 중국양식의 모방과 토착화의 단계를 거쳐 간일하고 회화적 표현이 강화된 조선적 특색을 가진 청화백자로의 양식적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처럼 15ㆍ16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 청화백자의 양식적 원형이 성립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과 유물이 빈약한 현실적 한계로 인해 조선시대 도자사의 한 부분이 아닌 독립된 주제로서의 이 시기 청화백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그러한 점에 주목하여 최근까지 축적된 조선시대 백자가마터에서 발굴된 청화 백자들을 상대편년자료로 적극 활용하여 면밀히 분석하고, 개인문집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여 새로 확보된 문헌자료들을 기존의 『朝鮮王朝實錄』의 기록들과 아울러 검토함으로써 15ㆍ16세기의 청화백자에 대한 조선사회의 인식, 제작과 사용의 구체적인 양상, 당시에 제작된 청화백자의 양식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고찰을시도하였다.
먼저 조선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되는 배경을 당시의 대내외적 상황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 초 중국 청화백자가 明 황실로부터의 전래품이나 무역품으로 유입되어 왕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특히 磁器에 의한 금속제 의례기의 대체정책의 결과로 청화백자의 사용 확대와 수요 증가가 이루어졌으나 전래나 유입에 의한 중국으로부터의 공급이 1450년을 기점으로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조선 왕실은 필요한 청화백자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자체적인 제작을 시도하게 되었고, 마침내 경질백자의 제작기반을 토대로 1450년 이후 1456년 이전, 즉 1450년대 전반경에 왕실의 주도하에서 자체적인 조선 청화백자의 제작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기록의 검토 결과, 우선 지금까지 청화백자로서의 존재가 불확실하였던 ‘畵鍾’이 당시 왕실뿐 아니라 士大夫家에서 청화백자 酒器의 대표적 존재로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에 대한 시기적인 검토 결과, 세종연간까지도 중국산 청화백자가 왕실전용의 기물로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세조연간이 되면 자체적으로 제작된 청화백자가 왕실과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시기 청화 백자의 제작과 사용은 세조연간을 기점으로 하나의 큰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은 분명하며, 그것은 왕인 세조의 청화백자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개입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 시기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은 철저히 조선왕실의 주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제작의 경우 分院의 설치와 함께 수준 높은 청화백자를 제작하게 되었지만 안료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해 한정된 수량만이 제작되었다. 사용에 있어서는 세조연간 법적 명문화가 이루어지면서 원칙적으로 왕실 외에는 사대부층만이 청화백자 酒器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뿐 민간에서의 사용은 사치풍조로 간주하여 엄격히 규제되었다. 이러한 청화백자의 제작과 시용에 대한 규제와 제한은 청화백자가 귀천의 분별이라는 신분적 상징성을 가진 기물이자 사치품이라는 당시 조선 왕실이 가졌던 청화백자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청화백자에 대한 욕구는 확대되어 밀무역을 통해 수입된 중국산 청화백자가 일반인들에 의해 사용되면서 실제적으로는 成宗-中宗年間에 이르면 전국적 범위로 청화백자의 사용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요지출토품들을 통해 확인된 이 시기에 제작된 청화백자의 양식적 특징과 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전세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발, 대접, 접시와 같은 일상생활용기명은 거의 없고 儀禮器 및 酒器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立壺, 전접시, 兩耳盞과 같은 특수기종이 이 시기 청화백자의 주종을 이루었음이 확인된다. 문양에서도 松竹梅나 詩와 같은 문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소재에의 편중이 두드러지는 것이 확인된다. 또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무렵에는 이미 중국양식에서 탈피하여 조선적 특색이 양식적으로 정착되는 것을 도마리 1호 요지의 출토품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나 번천리 9호 요지의 출토품에서 확인되듯이 16세기 중반경이 되면서 문양이 흐트러지고 도식화 되면서 전체적인 질과 격이 떨어지는 양식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조선전기 청화백자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진정한 전성기를 이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15ㆍ16세기에 조선 청화백자는 귀한 자들만이 쓸 수 있는 기물이라는 신분적 상징성이 부여된 채 철저히 왕실용 자기제작소인 官窯를 중심으로 한정적으로 제작되어 왕실과 사대부층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畵員에 의한 문양시문과 주 사용층의 취향을 충실히 반영한 松ㆍ竹ㆍ梅나 詩와 같은 문인화적 소재의 다양한 사용이 이루어지면서 회화에 필적하는 수준 높은 陶畵의 세계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특유의 청화백자 양식이 성립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5ㆍ16세기 청화백자를 통해 형성된 조선 청화백자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은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후기 청화백지들의 양식적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With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blue-and-white porcelain emerged as a new type of ceramic. As it changed and developed throughout the whole dynastic period, later Joseon blue-and-white porcelain display its own lyrical characteristics and pictorial design, which distinguishes it from its Chinese counterpart, Blue-and-white porcelain from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re extremely significant, for they show a process that at first followed chinese models but later shifts to establish a unique style of Joseon blue and white porcelains. Yet, due to the lack of historical records and extant wares from this period, it has been hard to conduct a focused study on 15th and 16th century blue-and-white porcelain.
This paper examines 15th and 16th century blue-and-white porcelain in terms of production and usage. By examining recently excavated materials discovered at Joseon white porcelain kiln sites, and analyzing both uninvestigated records from anthologies of private writings and official recordings found in Joseon Dynasty Cboronicles (『朝鮮王朝實錄』), this paper attempts to uncover in detail how the blue-and-white porcelain was thought of in Joseon society at that time and how it was made and used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Stemming from a close relationship with China's Ming (明) royal court, blue-and-white porcelain was imported from China in early Joseon. As the use of blue-and-white porcelain replaced metallic vessels in ceremonies, there was an increase in demand. After 1450, the limited importation of Chinese blue-and-white porcelain came to a stop. Thus, the Joseon royal court was forced to produce its own blue-and-white porcelain in order to meet the demand and stabilize ceramic production. As a result under the guidance of the Joseon royal court, the beginning of Joseon blue-and-white porcelain production can be dated to the first half of the 1450's.
Historical records, including newly discovered documents, confirm that the hwa-jong vessel (畵鐘) was widely used as a liquor glass by upper-classes, as well as in royal court during this period. Also.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世宗: 1418-1450), the Imported small quantity of Chinese blue-and-white wares strictly used only in royal court. However, in the period of King Sejo (世祖: 1455-1468). blue-and-white wares produced in Joseon were used not only by the royal court, but also by the Sadaebu (士大夫, literati class). Therefore, it is certain that the reign of King Sejo was a turning point in the production and use of blue-and-white porcelain, and that King Sejo's special interest and positive attitude toward blue-and-white wares stimulated the production and. development of blue-and-white porcelain.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the production and use of the blue-and-white porcelain was strictly regulated by the Joseon royal court. For production, high quality blue-and-white porcelains were creat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gwan-yo (官窯, the official kiln producing ceramics for the royal court) in Gwang-ju, but only a small quantity of blue-and-white porcelain was manufactured due to the difficulty of acquiring the cobalt pigment from China. Concerning usage, blue-and-white porcelain came to symboliz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lasses, since the Joseon government limited its use to upper-classes and the royal court. Common people were not allowed to own and use blue-and-white wares on the grounds that it was too luxurious for them. Despite this strict control. the desire for blue-and-white wares increased amongst the lower-classes, resulting in the wide-spread use of smuggled Chinese blue-and-white porcelains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成宗: 1468-1494) and King Jungjong (中宗: 1506-1544).
Meanwhile, the examination of excavated relics discovered at major kilns of this period confirms that only a limited number of blue-and-white wares were produced at gwan-yo. Yip-ho (立壺, a vertical shaped big jar), joen-jeop-si (dish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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