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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제사에서의 ‘犧牲’ 사용과 그 운영 = Review on the use and the operation of the sacrifice(희생) of the national rites in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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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고려시대에 성립된 국가의례를 바탕으로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희생, 즉 소, 양, 돼지를 대상으로 그 사용과 운영을 천착해 본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이후 당을 본받아 종묘를 비롯한 제사에서 희생을 소, 양, 돼지로 사용하였고, 이것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가적인 오례가 시행되면서 구체화되었다. 길례의 희생은 환구, 방택, 종묘, 선농 등에서 사용되었다. 이중 환구는 제사의 대상이 상제와 오제, 배위로 犢을 사용했는데, 5방의 색깔은 맞추기 힘들어 純色의 희생으로 대신하였다. 종묘의 희생은 예지에 나온 기록이 돼지만을 쓴다고 했지만 연대기에 국왕의 친제 기록이 보여 소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직과 방택은 신하의 섭제로 의식이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국왕이 친제한 경우가 있었고, 이때는 소를 희생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소사 혹은 잡사의 부류에 있었던 제사가 중사 또는 소사로 확대되었다. 고려시대 풍사, 우사, 뇌신은 풍운뇌우로 합사되어 중사로 승격되었고, 우사와 악해독, 역대시조는 새로 사전에 중사로 편입시켰다. 아울러 둑제, 여제, 영성, 노인성 등이 소사에 포함되었다. 이때 사용된 희생은 소, 양, 돼지였다. 이중 소는 흑우로서 농사를 짓는 등의 노동을 하지 않았고, 제주에서 특별히 길러 제사의 수효를 맞추게 하였다.
희생을 담당한 기구는 고려시대에는 종 8품의 掌牲署에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典廐署로, 다시 세조대 典牲暑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실렸는데, 이때는 종6품이 장관이었다. 전생서에서는 싣기 어려운 소를 제외한 양과 돼지를 장치를 이용하여 바쳤고, 또 희생은 거세하여 길렀다. 이때의 양은 명에서 수입하였는데 초기의 경우 그 수효가 넉넉하였다. 희생을 기르던 목장은 고양현, 양화도, 수원의 양성현 등에 있었다.
일 년에 들어가는 제수의 수는 소의 경우 『국조오례의』까지는 14두 이상이었지만 성종대 이후 의경왕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15두 이상으로 늘어났고, 이 숫자는 점차 늘어나 조선후기에는 20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소의 빛깔을 맞추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결국 종묘, 영녕전, 사직 등에는 흑우를 사용하였고, 문묘와 적전례, 문소전에는 황우를 사용하였다. 문묘는 騂牛를 사용해야 되지만 색깔이 비슷한 황우를, 적전례에는 靑牛를 써야 되지만 현실적으로 黃牛를 쓰고 다만 푸른 무명을 소에게 씌웠던 것이다. 그리고 희생인 소, 양, 돼지는 통째가 아닌 두 다리, 두 어깨, 두 갈비와 등허리를 합해 7체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임진 · 병자호란 이후와 또 현종 때에는 牛疫이 성행하여 희생을 대기가 힘들었고 이때 희생을 사육하는 방식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제향에 쓰는 흑우는 제주에서 나오지만 이를 매년 충청도 등지에 분양하여 肥澤하게 키워 이를 전생서에 보낸 것이다. 전기에 경기도 일대에 농장을 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었다. 흑우는 일반적인 황우와는 달리 살이 찌지 않았는데, 이는 제관들이 희생을 살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영조 21년 이후 왕이 직접 희생을 살피면서 이를 문책하고 제조를 파직하였다.
영조는 친경시 ‘靑牛가 없으면 황우로 대신 쓰고 청포의 보의를 뒤집어 씌운다’는 오례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흑우를 쓰는 것이 예제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大報壇의 제사에 희생을 사용했는데, 처음 대보단에 제사한 숙종은 희생을 마땅히 黑牛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반해 영조는 흑우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며 『대명집례』에 근거를 두었지만 결국 이것은 고치지 못하였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various sacrifices were used in the national sacrifices. It was confirmed as cattle, sheep, and pigs in the Goryeo period when the national sacrifice was established. Sacrifice is a kind of offerings to God, which is of great importance in the country, but the research on this was unexpectedly conducted.
In the Joseon Dynasty, the sacrifice was carried out by the Jeonsaengseo(전생서). The cattle that were used as sacrifices were black cattle, not yellow cattle used for farming. This black cattle is not recorded in the Goryeo Dynasty, but it was specifically raised in Jeju Island during the Chosun Dynasty. The cattle were brought to the barn without labor and raised under national interest. Also, the sheep was not produced in Korea but imported from China.
The number of cattle was 14 in the Kukjoolyeui(국조오례의) which was created in the early days of Seongjong, but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the number of seedlings increased to more than 20. Especially, as the number of kings in the Jongmyo(종묘, royal ancestors’ shrine) has increased, the number of cows has increased accordingly. Particularly, sacrifices were made by using cattle, sheep, and pigs, which were divided into 7 groups, including two legs, two shoulders, two ribs.
Sacrifices were made using black cattle in Jongmyo, Yongnyonjeon(영녕전), and Sajik(사직), on the other hand, yellow cattle was used before the Munmyo (문묘, tomb of confucius), Jeokjeonye(적전례) and Munsojeon(문소전) the personal shrine of royal family). The Munmyo uses yellow cattle which is similar in color, but the Jeokjeonye precedes the use of blue cattle, but in reality, it wears yellow cattle and the obscurity which is dyed in blue color. In the late Joseon Dynasty, Yeongjo insisted that Daebodan(대보단, Ceremony of the Ming Emperor) should use the black cattle, but eventually they did not win the opposition and used yellow cattl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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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12-31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rklife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lklife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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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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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3 | 0.63 | 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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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 | 0.66 | 1.486 | 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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