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전후일본 : 미점령기의 講和문제와 독립회복
저자
발행사항
용인 : 경희대학교, 2010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 일어일문학과 2010. 2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DDC
813 판사항(20)
발행국(도시)
경기도
형태사항
330 p. : 삽도 ; 26 cm
일반주기명
경희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이숙자
참고문헌 : p.328-337
소장기관
본고는 패전일본의 부흥과 재건, 그리고 講和條約 조인으로 독립을 회복하는 전과정에 6·25전쟁과 불가분리의 관련이 있음에 주목하고 그 독특한 관련양상을 고찰 ·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6·25전쟁은 우리민족의 입장으로서는 시기적으로나 여러 정황으로나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동일민족 간의 분쟁이 이민족 간의 분쟁 이상으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호간의 증오를 낳게 하고 한반도 전체를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연하게 존재하던 38선분단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진 상태로 존속하게 되고 본래의 38선 경계선 그대로의「정전라인」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반면 전후일본의 경우는 6·25전쟁의 영향으로 6·25전쟁특수 붐이 일어나 일거에 태평양전쟁의 패전에서 온 폐허와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일본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어 세계경제대국으로 비상하였다. 또한 미국주도의 GHQ의 점령하에 있은지 길지 않은 기간에 유리한 입장에서 對日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독립을 회복하고 국제사회에 당당하게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수상 吉田茂나 舊군인 간부급이나 우익들이 한결같이 말하듯 6·25전쟁은 패전일본에 기적과 같은 행운을 가져다 준 전쟁이었다.
經團聯會長 石村一郞은 6·25전쟁의 발발을「天佑神助」라고 했고 당시의 日銀총재이던 一万田尙登도 「우리재계도 구원받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재계인들 모두가「神風」이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러면 6·25전쟁이 일본의 패전 후의 고도성장과 강화문제 · 독립회복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저하여 패전일본과 6·25전쟁과의 독특한 관련에 대하여서의 고찰로부터 시작하였다. 그간에 얼마간의 관련연구의 성과가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남겨진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
먼저, 6·25전쟁 발발의 근원이 되고 있는 38선분단 연장선상에서의「해방 3년사」와 패전일본의「미점령하 3년사」의 차이의 분석이다. 제2, 6·25전쟁 발발과 깊은 관련이 있는 38선분단 경계선에서의 남한과 북한측의 끊임없이 반복된 越境攻擊, 남한 국내에서의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폭거와 테러 그리고 게릴라 등에서 유발된 국내혼란에 관해서의 연구의 미진함. 제3, 6·25전쟁과 관련되어 형성된 패전일본의 부흥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강화조약에 관한 검토, 이다. 제2차세계대전 · 태평양전쟁 종전 후의 패전일본의 한국문제에 관한 개입은 필연적으로 6·25전쟁 개입으로 이어졌다. 다음과 같은 비판,「한국전쟁으로 일본경제는 역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더욱이 그것은 단지 지정학적 이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피를 먹고 자란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한반도 전쟁 발발시 가장 중요한 기지로 준비되고 있으며 그 개입정도는 5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반세기 전과는 달리 일본열도의 재부흥이 아니라 동북아의 대재앙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에서 집약 될 수 있다.
이상의 문제의식에 대응하여 본고는 각기 독립된 4개의 테마로 성립되어 있다. 그것은 제1로, 6·25전쟁 발단의 원인이 되고 있는 38선분단 · 대한민국(이하, 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이라는 두 분단국가의 탄생, 그리고 남한에서의 미군정의 직접통치와 그 반대가 되는 패전일본에서의 미국이 주력이 되는 GHQ의 간접통치, 제2로, 6·25전쟁 발발 전후 · 전야의 위기의 양상, 제3으로, 6·25전쟁의 기원에 관한 검토, 제4로, 6·25전쟁의 패전일본에의 영향 형태,이다.
제1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의 분단을 대신하여 분단되는 한반도의 38선분단과 미 · 소 군정, 분단국가 탄생의 경위와 패전일본의 對日강화조약이 맥아더의 성명(1947년)으로 대두되는 시기와 때를 같이 하여 남한의 국내에서 계속되어 일어난 격렬한 폭거와 테러, 그리고 전쟁과 비견될 만큼의 엄청난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제주4·3사건, 여수 · 순천사건 등의 일련의 공산주의의 파괴적 게릴라활동은 6·25전쟁 발발의 기원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분석을 진전하면서 이와 비견되는 통일성을 띤 패전일본의 GHQ의 단독점령에서 오는 재건 및 GHQ 정책의 前期와 그 정책이 逆코스로 급선회하는 後期의 정책의 특성에 관해서 고찰했다. 제2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1949년 초에서 1950년 6월 25일, 바로 전쟁발발 직전까지의 전쟁발발이 감지되는 위기감에 관한 분석이다. 제3은, 6·25전쟁 발발 기원에 관해서의 여러 논란들을 집중적으로 피력했다. 6·25전쟁의 시동의 기원은 북한이 소련의 지지와 원조를 받아 「남침」을 기도하였다는 ‘남침설’과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을 기도하였다는 ‘북침설’이 오늘날까지도 공존하고 있다. ‘남침설’은 전통주의자들의 주된 논의에 속한다. 반면 이 전통주의자들의 논의에 반격을 가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있다. 즉 미국의 ‘음모설’과 함께 ‘남침설’을 경청하는 견해이다.
제4는, 6·25전쟁과 밀접한 패전일본의 6·25특수 붐의 형태와 일본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對日강화조약에 관해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6·25전쟁과 관련되는 수상 吉田茂의 대응책에 관하여 주목하였다. 패전일본의 독립회복의 성취를 위해서는 對日講和문제라는 난제가 가로놓여 있었는데 吉田茂는 6·25전쟁을 그 호기로 적극 이용하여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상의 분석의 결과로서 다음의 4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제1, 6·25전쟁 발발의 기원은 근원적으로 38선 분단이 원인이었다. 38선분단의 기원을 보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되기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분단으로 남과 북이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직접통치를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패전일본은 미점령군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미국이 직접통치에 임하려 하자 일본위정자들의 적극적인 외교로 저지시켜 막아 낸 성과다. 이 직접통치와 간접통치가 한반도와 패전일본의 정세를 극과 극으로 변질시켰다.
광복후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의 미군정에의 내밀한 관여는「해방 3년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편 패전일본의「미점령하 3년사」에서 드러나듯 패전일본은 GHQ의 간접통치를 이용하여 전후의 폐허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일에 정진하면서 자국의 국가상을 자주적으로 정립하여 나갔다. 이 기간의 미 · 소 냉전의 기류는 한반도에는 희생을 강요하게 된 반면, 폐전일본에는 반대로 수익자 위치에서 혜택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2, 6·25전쟁 발발 전야로서 특히 1949년이 주목되는 것은 38선분단이 있은 이후 수백번에 이르는 소규모의 남북간의 越境충돌이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던 사실 때문이다. 6·25전쟁 발발 원인 중의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당일에, 돌연히 북한이 남한을 급습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6·25전쟁은 급습인가?라는 논의가 아직도 의혹으로 잔존하고 있어서다.
제3, 한일 양국의 6·25전쟁을 보는 認識差異이다. 한반도에서는 6·25전쟁은 세계대전에 비견될만한 인명피해와 처참한 국토파괴, 민족의 비극만이 남은 전쟁이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는 반면, 패전일본은 6·25전쟁을 ‘天佑神助’의 기회였다고 무척 반긴 점이다. 그러나 ‘天佑神助’는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 대두된다. 이에 관하여서는 스톤(I. F. Stone)의 연구가 주목된다. 스톤은 6·25전쟁을 국제적 침략의 하나의 사례로 본다면 처음으로 준비한 측이 어느 쪽인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스톤은 그 기간 중에 많은 前後의 모순된 사실이 표면에 떠올라 있어 ‘아시아전쟁을 바라고 있던 측은 어느 쪽인가, 어느 쪽이 평화를 원하고 있었는가를 탐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스톤은 1951년 가을이 되어서야 6·25전쟁이 도발하는 침략의 명료한 하나의 사례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극동에서의 전쟁에 이익을 얻게 되는 사람들에 의해 고의의 검은 잇속을 챙기려는 계략의 결과라는 것이 확신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전쟁의 그후의 경과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적어도 2번의 기회(2번에 걸치는 38도선을 돌파하여 北進했던 시기)가 있었는데도 국련이 전쟁을 종결시키지 않은 사실과 종전회담의 긴 연장 등 이러한 일들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 이는 전쟁의 기원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국내의 전통주의의 주장에 비판적인 측은 북한이 먼저 공격해 들어왔다고 해도 그것은 미국이 함정(罠)을 파서, 계략을 꾸며 북한을 유인한 것이라는 설을 유포했다.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omings)는 자신의 저서『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1950년 6월의 본격적 전쟁의 개시는 이전부터 진전되고 있던 투쟁의 별개의 수단에 의한 계속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한국은 (강대국에 의한 패권다툼이라고 하는)한국인들 자신들의 힘으로서는 움직일 수 없는 외압의 힘의 와중에 있었다」고 제2차세계대전 후의 미 · 소 대결구도에서 전쟁의 遠因을 구하고 있다. 일본의 강제지배에서 해방된 한국은 통일독립을 소망하는 국민의 뜻과는 이반되는 국제사회의 냉전 역학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는 분석도 했다.
일왕 裕仁의 6·25전쟁에 관한 언동도 오늘날까지도 주목되고 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회견(1949년 1월) 때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6·25전쟁을 예견한 것 같은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발발과 패전일본이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GHQ를 후원한다는 이름으로 설치된 패전일본에서의 특별심사국(이하, 特審局)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심국에서 활동하는 우익의 중진들은 「朝鮮半島에서의 사태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하고 「소련이 군사적인 면에서 미국보다 열세라는 것을 고려하면 조선에서의 사태가 즉시에 제3차세계대전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표하면서 자신들이 6·25전쟁에 직접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GHQ에 의견타진에 나설 정도였다. 그리고 많은 일본의 舊軍人과 우익들은 6·25전쟁의 발발을 들어 내놓고 大日本帝國復活의 호기로 삼고 내심 환영하고 있었다.
제4, 6·25전쟁이 일어나자 패전일본은 연합군의 후방기지의 위치에서 적극적이고 다각적으로 참여했다. 6·25전쟁 전기간을 통해 일본은 후방기지, 中繼기지 그리고 일부 후방전투구역으로서의 前進基地의 역할을 자행하는 전투기지였다. 또한 물자보급을 위한 생산기지였다. 이렇게 6·25전쟁 수행을 위한 기지화한 체제를 6·25전쟁 후에도 유지하면서 그 방법으로 「全土基地方式」을 채용함으로서 일본은 미점령 하에서 벗어나는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바로 對日강화조약 체결에 의해서다. 또한 對日강화조약은 최종적으로는 여러 국제적 문제, 특히 6·25전쟁 종전 후의 한국문제에의 적극적인 참가와 발언권의 획득을 위해서의 실적 만들기의 장기적인 목표가 함유되어 있었다.
예컨대 6·25전쟁과 패전일본과의 관계는 총체적인 것이어서 그 전체적인 관계에 관한 분석의 총합에 의해서 비로소 6·25전쟁과 패전일본과의 밀접한 관련상 의 그 의미가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6·25전쟁의 의미를 살펴보면 戰場이 된 당사국인 남한 · 북한은 전쟁으로 전국토를 초토화 시키는 다대한 손실만을 남겼다. 종전 후의 중국과 소련의 대립, 그 사이에 낀 김일성 정권의 동요 등은 6·25전쟁의 중대한 여파의 하나였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연합국들도 손실만이 컸던 전쟁이었던 것은 남북한의 경우와 비견될 수는 없는 정도이지만 다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 하나 6·25전쟁으로 다대한 이익만을 얻은 나라는 패전일본이다. 6·25전쟁의 전쟁특수 붐으로 자본주의적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고 다시금 講和조약 조인으로 독립국의 地步를 견고히 하였다. ‘일본의 번영을 위해 그 때문에 흘린 조선민중의 피바다가 마침내 高價의 속죄의 보상을 요구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의 의미를 심도 있게 음미하게 된다.
이에 본고는 6·25전쟁의 원인과 그 의의를 새롭게 구명함으로서 오늘날까지의 연구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 공헌하려는 시도이고 패전일본과 6·25전쟁의 관계를 「총체적인 모습」으로 기술하는 것으로서 패전일본의 국가운영의 키워드로서의「6·25전쟁상」론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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