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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伏 鄭經世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현실대응 = Jeong Kyung-se's Political and Social Prestige during the Joseon Dynasty
저자
우인수 (경북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1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99-136(38쪽)
KCI 피인용횟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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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 Kyung-se was an excellent scholar and official in Youngnam district during the first half of 17th century. He was taught by Ryu Seong-ryong(柳成龍) who were Lee Hwang's best pupil. He was the leading pupil among Lee Hwang's school. Especially, he entered upon a political career as a member of deputations representing Youngnam(嶺南) Nam-in(Southern faction) during the King Injo's period and made the most of one's ability.
During his tenure of office, he fulfilled his obligation with selfesteem and a sense of mission about his work. But he could not keep clear of engaging in party strife. Therefore he had ups and downs in his political path and public office by the party strife.
He was disgraced with Nam-in(Southern faction) because of political attack of Buk-in(Northen faction) afte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had his best days again in the King Injo's time through a long period of an inactive political life. He helped and advised Kings using his knowledge and a noble character with all his hearts. During the process, he had been stripped from a government office because he advised King Kwanghaegun what somebody else hardly dared to advise to the king. For instance, he strongly advised bringing some new measures against current affairs and put the brakes on increasing King's own possessions. He also knew many things about the basic decencies of those civilized society and tried to apply the guidelines on upgrading the title of the King Wonjong, father of King Injo.
Meanwhile he suffered two big wars in his life. He raised an army in the cause of loyalty when Japanese invaded Joseon in 1592. After that, he came back to Royal Court and provided support. He was appointed Youngnam hososa(嶺南號召使) in the Chinese Invasion of Joseon in 1627. He undertook tasks gathering provisions and army.
Through such efforts we can make sure that he was a man of high prestige and confidence who could take the responsibility of the defense of the Youngnam district.
우복 정경세는 17세기 조선조 영남 남인 출신의 뛰어난 학자적 관료였다. 그는 퇴계의 수제자인 서애 류성룡에게 수학한 후 출중한 학문적 능력으로 퇴계 재전의 제자 중 선두의 위치를 점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정경세는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후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관료로 정계에 진출하여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었다. 그다지 많지 않는 퇴계학파 문과 출신 고위 관료의 처지를대표하는 존재로서 부각할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정경세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그의 현실대응이라는 하나의 인식 틀 속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는 관료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관직생활에 임하였는데, 당쟁기를살아간 당인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행로와 사환도 당쟁의 추이에 따라 부침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이 북인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함께 실각하였다. 오랜 정체와 침체의 시간을 거쳐 인조대에 그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실력과 자질을바탕으로 군주를 계옥하는 데 정성을 다한 관료였다.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하여삭탈 관작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도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될 부분이다.
수차에 걸쳐 시무책을 아뢴 바 있었으며, 궁중의 사사로운 재산 증식에 제동을 거는 발언도 수차례 올린 바 있었다. 예학에도 일가견을 가져 당시 원종 추숭을 둘러싸고 10년간 수차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전례 논쟁에서 올바른 예의 적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편 그는 그의 생애에 큰 국난을 두 차례나 겪었다. 30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의병을 일으켜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면서 치열하게 대응한 바 있었다. 그 후에는 조정에 복귀하여 임난의 극복에 힘을 보태었으며, 임난의 막바지에는 경상도관찰사로서 마무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65세의 나이에 맞이한 정묘호란 때는 영남호소사에 임명되어 군량과 의병을 모우는 책임자로 활약한 바 있었다.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조정이 믿고 영남 한 지역을 맡길 수 있을정도의 높은 위상과 신망을 가진 존재였음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정경세는 이황의 적통을 류성룡을 통해 이어받은 학자적 관료로서 영남 남인의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높은 학문적 자질을 바탕으로 군주의 계옥에 힘쓴 관료였으며, 예학에 밝아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한 예학자였다. 그리고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서는 자신의 한 몸을 던진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이로써 그는 영남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하였음은 물론 영남과 남인에 국한되지 않는 명성과 신망을 얻은 존재였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17-01-23 | 통합 |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2-28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퇴계학과 한국문화 -> 퇴계학과 유교문화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8-23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퇴계학과 학국문화 -> 퇴계학과 한국문화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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