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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 원효대사(元曉大師)와 명혜상인(明惠上人):고산사(高山寺) 관련자료를 중심으로 = General Articles : Masters Wonhyo and Myoe - Focusing on the Kozan-ji Temple Sour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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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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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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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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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3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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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불교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은 원효와 의상이라고 할수 있다. 원효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최고의 불교사상가이자 대저술가이기도 한다. 일본의 나라(奈良)시대에는 이미 신라에서 원효의 저서가 전래되어, 이시다모사쿠(石田茂作)씨의 ‘奈良朝現在一切經疏目錄에 의해서 알려져 있고, 거기다호리이케 슌포(堀池春峰)編‘大安寺審詳師經錄’에 의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원효의 저서로 판명되고 있는 것만으로 107종 231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불과 22종 27권에 불과하다. 한편 묘에(明惠)는 일본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聖僧’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가마쿠라(鎌倉)시대 전기의 화엄승이지만, 오백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7세기의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을 매우 추앙하고 있었다. 교토의 高山寺에 전래하는 『華嚴硏起』(국보)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사람의 전기와 설화를 소재로 한 것으로 묘에가 제자인 죠닝(成忍)이란 화승에게 명하여 만들게 했다고 하는 會卷(두루마리 그림)이다. 화엄종의 종조라고 한다면중국의 지엄(智儼)이나 법장(法長)을 그린다든가, 아니면 일본의 화엄종의 開祖인 신죠(審祥)나 로변(良弁)을 그리게 하면 될 텐데, 왜 묘에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행장을 그리게 한 것일까. 그것은 원효와 의상에 대해서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품고, 두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묘에 자신의 사상이나 체험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즉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점 쇠퇴해 가는 화엄교학의 부흥을 위하여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의 전기와 설화를 문학화, 회화화하여 신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고승 원효는 두 번에 걸쳐서 당에 유학을 시도했지만, 그 도중에 고분 속에서 귀신의 꿈을 꾸고 萬法唯識의 근본원리를 깨달아 신라에 머물면서 평생 민중의 교화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묘에도 석가의 유적이 있는 인도에 순례하는 것을 오로지 동경하여 두 번이나 인도에 가는 계획을 세웠지만, 가스가묘징(春日明神)의 託宣에 의해서 결국은 천축행(天竺行)을 단념하게 된다. 서역에서 귀국한 玄長의 유식학(唯識學)을 동경하여 입당을 시도한 원효와, 석가가 태어난천축(天竺)에 동경해서 인도에 건너갈 것을 계획한 묘에와 그 형태는 다르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국의 땅에서 석가의 가르침이나 그 정신에 깊이 접해보고 싶다고 하는 의지는, 양자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원효와 묘에(明惠)에 대해서 입당과 인도순례를 단념한 배경과, 두사람의 수행관에 주목하면서 高山寺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華嚴硏起』, 『삼국유사』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더보기Wonhyo and Uisang can be said to have been remarkably active in the early Unified Silla period with Wonhyo regarded as the greatest Buddhist thinker and writer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His writings were already transmitted to the Japan during the Nara period, which can be confirmed in Ishida Mosaku’s (石田茂作) “A Table of Contents of Sutras from Nara to the Present” (Narachou genzai issai kyosho mokuroku, 奈良朝現在一切經疏目錄) and Horiike Shunpo’s (堀池春 峰) edited “Master Shinsho of Daian-ji Temple’s Sutras” (Daian-ji shinshoshi keiroku, 大安寺審詳師經錄). The number of confirmed writings by Wonhyo is a staggering 231 volumes on 107 subjects, of which only twenty-seven volumes on twenty-two subjects are extant. On the other hand, Myoe is appraised as the strictest of the ‘holy monks’ in Japanese Buddhist history and although a Kegon monk of the early Kamakura period, highly revered the seventh-century monks Wonhyo and Uisang despite their five hundred year time span. The Kegonengi Picture Scroll (華嚴聯起), a national treasure passed through the ages in Kyoto’s Kozan-ji Temple, is a scroll painting (emaki) of the lives and tales of Wonhyo and Uisang that Myoe ordered his disciple Jyonin (成忍) to illustrate. Rather than painting the Chinese monks Zhiyan (智儼) or Fazang (法長), founders of the Huayan School (the Chinese equivalent of the Kogen sect), or the Japanese founders of the Kogen sect Shinsho (審祥) or Roben (良弁), why would Myoe order that Silla’s Wonhyo and Uisang be illustrated? It is probably because of his immeasurable respect and admiration for the two, and to borrow their names for his own use in spreading his ideology and experiences. That is, the lives and tales of Silla’s holy priests Wonhyo and Uisang were written and pictorialized to revive the gradual decline of the Kegon sect’s teachings and to fulfill the need to easily sermonize to believers. Although Wonhyo attempted to study Buddhism abroad in Tang China twice, he stayed in Silla exerting his efforts in proselytizing the people after a ghost from an ancient tomb appeared in his dream and he realized the basic principle of ten thousand phenomena and one consciousness (萬法唯識). Myoe also yearned to go on a pilgrimage to India, where the remains of the Sakyamuni were kept, and twice made plans to do so, but relinquished them when the oracle of the kami of the Kasuga Shrine dissuaded him. Wonhyo, who cherished the Yogacara School (唯識學) espoused by Xuanzang (玄長) and sought to enter Tang China and Myoe who attempted to cross over to India were different, but both had in common the will to cross space and time in order steep themselves in the spirit and teachings of the Sakyamuni Buddha. This study will focus examine the backgrounds of Wonhyo’s entering Tang China and Myoe’s India pilgrimage while focusing on their views on Buddhist practice using sources from the Kozan-ji Temple such as the Kegonengi Picture Scroll and others such as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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