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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김광제의 현실인식과 계몽운동사상 역할 = Kim Gwang-je’s awareness on reality and his role in the enlightenment movement in the Great Han Era
저자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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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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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5-48(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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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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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주역인 김광제는 전통교육을 받았다. 23세인 1888년 무과에 합격ㆍ관계에 진출한 이래 1902년까지 약 15년간이나 실제로 재직한 기간은 5~6년에 불과하였다. 오랫동안 고향 남포에 은거하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1896년과 1905년 전남 고군산도로 유배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儒會軍과 의병활동 등 다양한 경험은 현실인식 심화와 정확한 정세판단을 이끄는 요인이었다.
재직한 주요 관직은 동래경무관과 삼남찰리사 등이었다. 공직기강 확립을 위한 활동은 지배체제 문란 등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에 역부족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래 여러 차례 건의문과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현실정치에 수용될 수 없었다. 당시까지 인식은 충군애국적인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공제소 조직과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을 저지하려는 노력은 경제적인 자립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론과 맞닿아 있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안은 문화계몽운동 투신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대구에서 서상돈 등과 대구광문사를 조직한 후 교육활동ㆍ출판활동ㆍ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동보』 발간이나 서적종람소 운영 등도 민지계발을 위함에서 비롯되었다. 대한자강회ㆍ대한협회ㆍ기호흥학회 임원과 시찰원 활동은 지역사회 계몽운동을 촉진시키는 기폭제였다. 대한협회 호남시찰원과 경북 개령ㆍ김천ㆍ선산지역 방문과 강연회는 근대교육을 확산시키는 ‘촉매제’나 다름없었다. 순회강연회에서 연설은 당대를 대표하는 명연설가로서 부각시켰다. 그럼에도 ‘국채보상운동=김광제’라는 이해와 인식은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1910년대 경남 마산에서 문예활동ㆍ출판활동과 3ㆍ1운동 이후 조선노동대회를 통한 노동운동 주도 등은 이와 같은 경험적인 산물임에 틀림없다. 삶의 궤적은 심화된 현실인식과 정세판단에 기초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활동가였다. 충남 홍주군 김병년이 『마산문예구락부』 창간호 발간에 즈음하여 보낸 축문은 이를 반증한다.
Kim Gwang-je who was a leading role in the national dept payment movement got traditional education. He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and entered government service from the age of 23 in 1888 to 1902. But he held office just for 5 or 6 years for those 15 years. He retired to hermitage in his hometown, Nampo and planed ahead for a long time. He exiled to Gogunsando, Jeonnam in 1896 and 1905. His various experiences participating righteous army and Yuhoegun(儒會軍) were a main factor to encourage his profound grip on reality and right analysis of the situation.
He worked as Dongnae duty assistant commissioner(東萊警務官) and Samnam Chalisa(三南察里使). He tried to tighten discipline among government officials but it was not succeeded because of disorder of the system. Since his retirement, he proposed and appealed to the government but his idea was inadequate in realistic politics. By then, his movements were based on the loyalty and patriotism. His organization of Gongjeso and his blocking of currency circulation of Japanese First Bank bills met the idea to build the independent country through self-supporting economy.
One of his alternatives for realizing his ideal was devotion to cultural enlightenment movement. After Ulsa illegal treaty, he organized Daegu Gwangmunsa with other people including Seo Sang-don in Daegu and worked in various fields such as education, publication and press. The publication of monthly-magazine 『Daedongbo』 and management of complex-library were proceeded from the will for development of the public intellect. One of executives in Daehan Jaganghoe, Daehan Hyeophoe, Giho Heunghakhoe and his activity as Shichalwon(視察員) were a catalyst for encouraging the local enlightenment movement. His work as a Honam Inspector in Daehan Hyeophoe and visits and lectures in Gaeryeng, Gimcheon, Seonsan Gyengbuk were an accelerator for spreading modern education. His speech in lecturing tour made him as one of the greatest speakers in the time. Nevertheless, his role was only limited in the National Dept Repayment Movement.
His literature and publication activities in Masan, Gyengnam in the 1910s and his leading role in a labor movement through ChoSeon Labor Convention(朝鮮勞働大會) since the March 1st Independent Movement must be the product of his these experiences. He was an activist who lived based on a deep grip on reality and right analysis of the situation. This point was showed by a congratulatory address that Kim Byeng-nyeon sent to him from Hongju-gun, Chungnam when the first issue of 『Masan literature club』 was 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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