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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혹논문 2 : 동계정온(桐溪鄭蘊)의 학통과 학문사상 = Study on Scholastic Tradition and Learning Idea of Donggye(桐溪) Jeong-on(鄭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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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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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0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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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蘊(1569∼1641)은 경남 安陰에서 태어나 국외적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세 침략과 국내적으로 광해군의 폭정 등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에 살았다. 그는 이런 큰 변고를 만날 때마다 꼿꼿한 의리로 맞섰다. 45세(1613년) 때 永昌大君이 죽고 인목대비가 폐위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甲寅封事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10년간 위리안치된 것, 68세(1636년) 때 청나라 군대가 대거 침략해 오자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인조가 항복하려 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배를 찔러 자결하려 하였던 것, 인조가 항복하자 고향 某里로 돌아와 花葉樓를 짓고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친 것 등에서 유교적 지식을 갖추고 올바른 義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동계가 태어난 지역인 慶尙右道안음은 曺植의 南冥學의 분위기가 강하게 미치던 곳이다. 게다가 그는 합천 출신인 남명을 가장 닮은 萊庵鄭仁弘의 문인이 되었고 또 자신이 기질도 그러한 것을 표방하였기에 남명→내암으로 이어지는 남명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는 한편 그는 退溪李滉의 수제자 月川趙穆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더나아가 퇴계와 남명 모두를 사사했던 寒岡鄭逑를 스승으로 섬겨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조화를 이루려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양학파의 특성과 장점을 한 몸에 조화를 이루어 학문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서 정치 현실에 직접 나섰던 사람이었기에 퇴계와 남명 이후 영남학파의 학술사상사에 있어서 매우 주목되는 인물이다. 더나아가 그는 광해조의 대북정권 때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집권 때에는 南人淸論자로 부각하면서 龍洲趙絅과 眉.許穆을 제자로 양성하여, 이황→정구→정온→조경ㆍ허목→李瀷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 학통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위치에 서 있어 또한 이 방면에 대단히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동계는 퇴계학보다 남명학에 더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여느 남명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었다. 즉 경상우도 지역 선비들이 남명학의 영향으로 은둔하려는 경향이 다분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하였고, 국가적인 주요한 정치 사건과 거의 대부분 관계를 맺고 그 중심에서 그 사건을 겪어 나가는 등, 광해조와 인조조에 걸쳐서 가장 강직한 신하가 되었다.
더보기Jeong-on(鄭蘊, 1569∼1641) was born in Gyeongnam Aneum(安陰), lived in a very confusing period, e. g. foreign intrusion, such asImjinwaeran, Byungjahoran, etc. internationally and Gwanghae`styranny, etc. domestically. Whenever he met such big trouble, he facedwith straight loyalty. At his age of 45(1613), when Yeongchangdaegun(永昌大君) died and Inmokdaebi(仁穆大妃) was dethroned, heascended Gabinbongsa(甲寅封事) and banished to Jeju island for 10years, at his age of 68(1636) he tried to commit suicide by cutting hisabdomen with his sword on his waist when Injo(仁祖) intended tosurrender when encircled in Namhansansung , when a large Qing(淸)army invaded, and finished his life in a retiring place by buildingHwayeobru(花葉樓) after returning to his home, Mori(某里) when Injosurrendered, etc. he was a scholar who prepared Confucian knowledgeand exerted efforts to practice right loyalty(義). Gyeongsangwoodo(慶尙右道) Aneum, where Donggye was born, wasstrongly influenced by the mood of Josik(曺植)`s Nammyeonghak(南冥學). Furthermore, he became a literary person of Naeam(萊庵) Jeong, inhong(鄭仁弘), who most resembled Nammyeong from Hapehcon, also, he claimed that his disposition was similar, therefore, he was deeplyinfluenced by Nammyeonghak, which was continued Nammyeong→Naeam. On the other hand, he served Wolcheon(月川) Jomok(趙穆), best student of Toegye(退溪) Yi Hwang(李滉) as his teacher, also, served Hangang(寒岡) Jeonggu(鄭逑), as his teacher, who served bothToegye and Nammyeong, and intended to harmonize NammyeongSchool and Toegye School. In other words, he was a person whoentered the political reality with both scholastic aspect and practicalaspect simultaneously by harmonizing the characteristic and advantageof both schools in himself, he was a remarkable person in scholastichistory of thought of Yeongnam school since Toegye and Nammyeong. Furthermore, he was emerged as a Namincheongronja(南人淸論) whenGwanghae`s daebuk power or Seo-in`s seize power since Injobanjeong, trained Yongju(龍洲) Jogyeong(趙絅) and Misu(眉수) Heomok(許穆) asdisciples, and became a remarkable person in this field, since he wasin the position of connecting Guihonamin(畿湖南人) school, which isconnected to Yi Hwang→Jeonggu→Jeong-on→Jogyeong·Heomok→Yiik(李瀷). However, Donggye showed different appearance from otherNammyeong scholars, while he was more strongly influenced byNammyeonghak rather than Toegyehak. That is, nevertheless thescholars of Gyeongsangwoodo region had a tendency to live inseclusion under the influence of Nammyeonghak, he intended toactively participate in politics, differently, also, became the mostupright vassal during Gwanghae and Injo period, while experiencingthe events in the center by forming relations with most of nationalmajor political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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