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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평안도의 문화변동과 지역민의 동향 = Cultural Transition and Regional Movements in Late 18th and Early 19th Century P’yŏng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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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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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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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8(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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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평안도 사회는 종래 京鄕分岐에 입각한 京과 鄕의 양극화된 설명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질적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평안도는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와 고려의 도읍지였던 경험과 전통을 가진 지역이었다. 이처럼 일정
부분 ‘京’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새롭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평안도의 지역 문화와 지역민의 동향도 그만큼 이전 시기에 비해 다른 차원에서 개진될 공산이 커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평안도 사회에서 자기 지역 문화에 대한 전통을 정리·발굴하고 그 가치를 음미하거나 재조명하는 양상이 군현 단위로 강하게 대두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16세기 말 평양을 필두로 몇몇 군현에서 간헐적으로 편찬되던 읍지가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는 각 군현마다 고르게 작성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는 지역 내에서 인물과 재력 등 제반 역량이 갖추어지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선양하려는 인식 등이 뒷받침되었기에 성사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현과 군현 간에 지역사 인식이 충돌하여 평안도 사회에 균열이 야기되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군현마다의 개별적·독자적 문화 성장으로 평안도의 문화 역량이 증대되는 가
운데 道外 다른 지역과의 관계도 재설정되고 있었다. 평안도 유생들은 대체로 18세기 전반까지는 三南地方과의 對比를 통해 지역 사정을 호소하거나 지역의 요구를 제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경향분기가 극대화되는 추세에 따라 점차 삼남을 넘어 권력이 집중된 서울과의 대결 의식을 전면화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났다. 홍경래 난(1811)을 위시해서 19세기 전후에 평안도인에 의해 주도된 각종 반역·반란 사건에서 그러한 면모를 뚜렷이 목도할 수 있다. 그런데 反京勢力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부류와는 달리 체제 내에서의 지위 상승을 도모하는 세력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문과 급제에 부심하고, 족보와 문집 등을 대대로 편찬하면서 외형상 경화사족과 같은 벌열로서의 모습을 구축해 나가다가, 홍경래 난을 맞이해서는 ‘忠義’를 생존전략으로 삼아 反京 활동을 진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전반 평안도 사회를 격동시킨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방을 공통 지반으로 하는 反京세력과 忠義세력이 격돌하는 場이 되었다. 여기에서 후자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忠義는 평안도 사회를 운영·지배하는 강력한 명분과 노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렇게 향촌 지배권을 장악한 충의세력은 善의 강조와 相互扶助, 지역 적폐를 해소하기 위한 三政策의 제시와 실천 등을 통해 홍경래 난 진압 이후의 지역간 내부 갈등과 분열을 수습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19세기 후반 평안도 문인의 중앙 진출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계기는 이와 같은 토대에서 마련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Recent studies have focused on the divergence between Seoul and other regions("京鄕分岐") in understanding P’yŏngando society, a phenomenon which prevailed throughout 18, 19 century choson, An example can be found in the typical explanation of Hong Kyŏngnae Rebellion as a rebel against central concentration and monopolization of power and wealth. However, Pyŏngan society at that time was not only exposed to the circumstance of 'regional
discrimination' but was also undergoing a substantial change following the steps of Seoul. It is fair to say that P’yŏngando was growing to show several aspects of ‘the capital(京)’, and there was increasing probability that regional culture and local movements were about to advance toward another direction. This regarded, it is worthy to note the ascending trend of unearthing and organizing cultural traditions of their regions and of savoring and illuminating their values, which was integrated in the compilation of upji. Upji compilation was possible due to the expansion of human and material capacity and the support of regional consciousness. However the abundance in cultural capacity and the growing individuality of provinces also became a cause of regional diversion and rupture which resulted in numerous conflicts and challenges among provinces. As the gap between Seoul and the other regions widened, Pyongando also started to express a defiant stand against the powerful and wealthy Seoul. This is evident in various rebellions leaded by people of P’yŏngando around 19th century, represented by the Hong Kyŏngnae Rebellion. On the contrary, there was also a group of people seeking an elevation in their social rank inside the existing system(anti-capital forces, 反京勢力). Showing striking resemblances with the central aristocratic family status(閥閱), they made substantial efforts to pass the civil service exam and to compile family genealogies(族譜) and collections of literary works(文 集). They also adhered to a position suppressing the rebellion(‘義兵’) with loyalty(忠義) as their survival strategy. In this view, Hong Kyŏngnae Rebellion in 1811 can be read as a collision of the anti-capital and loyal forces both based on P’yŏngando. The triumph of the later gave loyal forces a strong ground for advancing into the central government while justifying their rule and control over the Pyŏngan society.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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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5-31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5 | 0.75 | 0.6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6 | 0.49 | 1.216 | 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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