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유교 윤리 소환과 경제 갱생 프로젝트 - 익산문묘(益山文廟)를 중심으로 -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0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51-83(33쪽)
KCI 피인용횟수
1
DOI식별코드
제공처
1920년대부터 연달아 발생한 공황으로 1930년 일본 경제는 만성적 위축 상황에 직면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경제를 활성 시킬 방안으로 농가가 자체적으로 경제 갱생을 도모하는 ‘농가경제갱생계획’ 즉, 농촌진흥운동을 수립·시행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농 가 경제를 갱생시켜 국가적 궁핍을 해결하는데 목적을 두었지만 영농 관련 기술의 보급 이 아닌 농민의 ‘정신’을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조선총독부가 농가에 보급하고자 한 정신은 ‘숭고한 희생적 봉공심(奉公心)’과 ‘자기를 바치는 노력’이었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이 ‘숭고한 정신’을 유도하기 위해 조선 사회에서 통용되던 향약 덕목인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 (患難相恤)’에 주목하였다. 향약의 특성상 경제적 자립 문제뿐만 아니라, 지역 민심을 지배 정책에 알맞게 ‘교화(敎化)’하고 민풍을 ‘개선’할 수 있는 덕목이라 판단하였기 때문 이다. 1933년 학무국장은 모든 향약 단체에 기본 덕목인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외에 ‘생활개선(生活改善)’과 ‘산업장려(産業獎勵)’라는 두 개의 조목을 추가 하도록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추가적으로 지시한 ‘생활개선(生活改善)’과 ‘산업장려(産業獎勵)’는 자 력(自力)에 의한 생산성 고양으로 경제 갱생을 도모하는 농촌진흥운동의 목적과 맞닿아 있다. 조선총독부는 촌락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생활을 향약 규약으로 통제하여, 개인 에게 적극적인 경제 활동의 수행을 종용하고 이로써 ‘봉공(奉公)’을 유도하였다. 결국 일제강점기 향약은 지역공동체 구성원에게 식민지배 정책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강권하 기 위해 마련된 ‘선택된 전통’이자, 변형되어 ‘소환된 전통’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장려에 따라 1935년 1월 익산문묘(益山文廟)에 향약이 신설되었다. 외피는 지역공동체의 형식을 띠었지만 식민 행정 권력에 의해 배태된 익산문묘 향약은 활동 측면에서 관변적 성격을 보였다. 조선총독부는 향약이 지닌 재산 또는 향약 구성원 이 지닌 재산을 식민통치에 흡수하려는 ‘물질적 동원’과 향약 구성원의 신체를 식민지배 체제에 적용시키는 ‘인적 동원’ 두 가지를 목적으로 설정하고 향약을 동원하였다.
더보기The economy of Japanese imperialism shrank in 1930 due to the economic depression that continued from 1920s.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established and implemented the policy, where villages independently rehabilitated economy, in order to revitalize the economy of the Colonial Joseon. This was the so-called ‘Rural Development Movement.’ This policy aimed to solve country’s poverty through the revival of rural economy. However, it focused on changing farmers’ ‘thoughts’ rather than spreading farming techniques. It attempted to execute the colonial policy smoothly by assimilating farmer’s thoughts to colonialism. The spirit tha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spread to villages was the ‘spirit of sacrifice that even sacrifices one’s life for the country.’ At this time, sacrifice was promoted as a noble image. In 1932,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brought back and implemented Hyangyak(鄕約) that had been commonly used in pre-modern Joseon society in order to encourage spirit of sacrifice in people. Due to the nature of Hyangyak, it was socially appropriate to promote the good, be aware of the bad, and help the ones in need. Therefor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believed that Hyangyak would play a significant role in economic revival and dominating public sentiment. Hyangyak that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mplemented was added with the additional goals, ‘industrial development’ and ‘improvement of life’, in addition to the existing Hyangyak. In accordance with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s encouragement of Hyangyak, Hyangyak was newly established in Iksanhyanggyo Confucian School in January 1935. On the outside, it was in the form of a community but, in fact, was an official organization created and encouraged to be implemented by the administration of imperialism. Therefore, this Hyangyak focused on spreading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s ruling policies to villages rather than ethical reformation of local residents.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bsorbed the asset owned by Hyangyak and individual asset of the members of Hyangyak as colonial funds. Also, it attempted to convert the ideology of individual members of Hyangyak to pro-colonialism through continuous lectures. Since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the activities of Hyangyak changed. It was to change the mass of Colonial Joseon accordingly to wartime conditions. Therefore, it began promoting conscription system, pressing for wartime money, encouraging the production of war supplies, and saving war supply consumption. Since 1940s when the economy deteriorated even further,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nsidered that economy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outcome of war, and emphasized labor to increase productivity of the country.
더보기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32 | 0.32 | 0.38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9 | 0.42 | 0.641 | 0.13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