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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坡居士 趙鼎九의 生涯와 活動 = The Life and Activities of Jo Jung-gu, the Wolpa Geosa (月坡居士)
저자
오경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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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41-268(28쪽)
제공처
The life and activities of Wolpageosa Jo Jung-gu. Jo Jung-gu (1860-1926) was a patriot who lived in the Korean Empire and Japanese colonial rule. He was the second son-in-law of Heungseon Daewongun and the brother-in-law of King Gojong. He is also an in-law of independence activist Lee Hoi-young. In such an environment, Jo Jung-gu was able to live his life comfortably with great power despite foreign interference and aggression, but foreign interference and the threat of Japanese imperialism did not allow him to live comfortably. As an official of the Gungnaebu, Jo Jung-gu did not hesitate to carry out the secret orders of King Gojong to restore the sovereignty of the Korean Empire as well as the royal administration. In 1903, Jo Jung-gu also participated in the compilation of Jeungbomoonheonbigo(增補文獻備考). This was done in 1769 by order of the king to examine the rapidly changing situation surrounding Joseon and respond to the change. Jo Jung-gu and his family were walking in the midst of a whirlwind of challenges and counterattacks such as the Hague Special Envoy Case in 1907 and Hanil Unification in 1910. Jo Nam-seung, son, delivered a credential to Hulbert, an American, asking him to withdraw King Gojong's slush funds, and hid 87 important diplomatic documents from Joseon at the time of King Gojong's orders. When Jo Jung-gu finally became annexed in 1910, he even attempted suicide, refusing the silver medal and baron title given to high-ranking 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b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 would rather die righteously, but I cannot live dishonorably.” Afterwards, Jo Jung-gu fled to Beijing, China. After King Gojong's death in 1919, after completing his funeral, he was named on the list of 18 Pyeongjeonggwan(評政官) when he established the Hanseong Provisional Government. Although he was not an official patriotic movement, his desire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independence was stronger than anyone else's. Afterwards, he fled to China and wandered, but after hearing the news of the death of his second son, Nam-ik Jo, he died while living at Bongseon Temple. Shortly before his death, he published a document disapproving of the treaty of annexation of Sunjong, stating that the annexation of Treaty Korea and Japan was arbitrarily proclaimed by Japan and a group of evil spirits.
더보기조정구(1860~1926)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애국자다. 그는 흥 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이자 고종의 매형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이회영 과 사돈지간이다. 이와 같은 조정구의 환경은 외세의 간섭과 침략에도 불구 하고 막강한 권력으로 일생을 안락하게 살 수 있었지만, 외세의 간섭과 일제 의 위협은 그를 안락하게 살게 하지 않았다. 우선 조정구는 궁내부의 관원으 로 왕실 행정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고종의 비밀지령을 수행하는 일조차도 주저하지 않았다. 조정구는 1903년 증보문헌비고편찬 에 참여하였다. 1769년 왕명으로 조선을 둘러싸고 급변하는 정세를 살피고 그 변화에 대응하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정구와 집안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1910년 경술국치와 같은 일제의 조선침략이라는 도전과 응 전의 소용돌이 속을 걷고 있었다. 아들 조남승은 고종의 비자금을 인출해 달 라는 신임장을 미국인 헐버트에게 전달했고, 당시 조선의 중요 외교문서 87 건을 고종의 명을 받아 일제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조정구는 1910년 마침내 합방이 되자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고위 관리에게 내린 은사금과 남작 작위를 거부하고 자살시도까지 했다. “차라리 의롭게 죽을 수는 있지만 욕되게 살 수 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조정구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장례 를 마치고,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할 때는 評政官 18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 다. 비록 표면적인 활동은 못했지만, 나라의 자주와 독립 염원은 누구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유랑했다가 둘째 아들 조남익의 사망소식을 듣고 봉선사에 기거하다가 사망하였다. 죽기 직전에는 한일 병합이 일본과 역신의 무리들에 의해 제멋대로 선포했다는 순종의 병합조약 否認文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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