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숙종대 장녕전(長寧殿) 건립과 어진 봉안 = The Establishment of the Jangnyeongjeon Hall and Enshrinement of King Sukjong’s Portraits During His Reign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1
작성언어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68-101(34쪽)
KCI 피인용횟수
0
DOI식별코드
제공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재위 중인 국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전통을 다시 살려 1695년과 1713년에 자신의 어진을 진전에 봉안하게 했다. 1695년에 조세걸(曺世傑, 1636-?)이 그린 숙종 어진은 2본이었으며, 1본은 강화부(江華府)의 장녕전(長寧殿)에, 다른 1본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었다. 강화는 외적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갖춘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이자 국가의 보장처(保障處)로 인식되었으며, 숙종 이전에도 이곳에 진전을 세우고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을 봉안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1695년의 어진 제작과 진전 건립을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진행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신하들 중 일부가 강화의 영전(影殿) 영건(營建)을 반대하자 숙종은 비밀리에 서둘러 어진을 강화로 내려보냈다. 이후 강화 유수 김구(金構, 1649-1704)가 격식을 갖추어 어진 봉안 의식을 엄숙히 거행하도록 건의함에 따라 숙종은 어진 봉안 행사를 공식적으로 준비하게 하였다. 그는 예조의 관리들을 강화에 파견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장녕전에 어진을 봉안하게 했다. 이때 숙종 어진은 흑칠궤에 담긴 상태 그대로 장녕전 내부 어탑(御榻) 위에 봉안되었다.
1695년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은 숙종의 평소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학창의(鶴氅衣)와 당혜(唐鞋)를 착용하고 머리에 역괘고후관(易卦高後冠)을 쓴 모습의 전신상이었다. 이러한 옷차림은 조선 시대 국왕의 전형적인 어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숙종은 일상에서 학창의를 종종 착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사대부들도 학창의와 고후관을 일상복으로 착용했다.
1695년에 봉안된 숙종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새로 그려진 어진으로 교체되었다. 1713년은 숙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숙종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어진 제작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원유관본과 익선관본 어진이 각 1본씩 그려졌으며 원유관본은 강화 장녕전에, 익선관본은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어진 제작을 위해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어진 제작과 관련된 많은 사안들이 숙종과 신하들 간의 논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는 의식도 미리 응행절목(應行節目)을 마련하여 엄숙히 거행했으며, 왕세자와 백관들이 경덕궁의 정문에 나와 강화로 출발하는 어진을 배웅했다. 이처럼 1713년의 어진 제작과 봉안은 거의 모든 면에서 1695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진을 펼쳐서 봉안하지 않고 궤에 들어 있는 상태로 어탑 위에 봉안한 것은 이전과 동일했다. 장녕전과 선원전에 새로운 어진이 봉안된 후 기존 어진은 세초(洗草)되었다. 두 곳의 숙종 어진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승하한 이후인 1720년에 펼쳐서 봉안되었다.
숙종이 1713년에 어진을 새로 제작한 표면적 이유는 기존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이 미진(未盡)하여 후대에 전하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진’이라는 표현은 인물 묘사에 사실성이 부족함을 뜻하기보다는 국왕의 어진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창의와 고후관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어진은 사대부 초상화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숙종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시각적으로 국왕의 권위와 우월함이 뚜렷이 드러나는 어진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새로 그린 어진을 봉안한 뒤 기존 어진들을 세초해서 없애 버린 것은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은 국왕의 어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로 여겨진다.
King Sukjong (r. 1674-1720), the 19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resumed the production and enshrinement of portraits of present kings that had ceased for a long time. In 1695, Sukjong had Jo Segeol (1636-?) paint two portraits of himself. One of the two was enshrined in the Jangnyeongjeon, a portrait hall newly constructed on Ganghwa Island. Thought to be secure from foreign invasions and also located close to the capital where the royal palace was situated, Ganghwa Island would have probably been considered the most fitting location for the enshrinement of the royal portraits. King Sukjong did not inform his officials of his portrait production and the construction of the Jangnyeongjeon Hall. He secretly sent the portrait to Ganghwa Island even before the completion of the portrait hall. Following the proposal of Kim Gu (1649-1704), a local governor of Ganghwa Island, the king dispatched officials from the capital to have them conduct a ceremony for the portrait enshrinement. Different from portraits of the former kings in formal robes displaying their status as king, that of Sukjong enshrined in Jangnyeonjeon Hall showed him in a hakchangui robe and a gohugwan hat, plain and informal daily costumes for noblemen during the Joseon period.
In 1713, King Sukjong instructed the painters to depict himself in the king’s official robes. A temporary office for the superintendence of the royal portrait production was organized. In the office, court officials actively expressed their opinions about the central issues in the creation of the portrait such as selecting painters and choosing the best sketch for the portrait. Two portraits of the king in total were produced at the time. One showed him dressed in a gollyongpo robe with an ikseongwan hat, and the other presented him in a gangsapo robe and a wonyugwan hat. The one depicting the king in a Gangsapo coat replaced the old portrait in the Jangnyeongjeon Hall. The officials prepared the manual for the conveyance and enshrinement of the portrait which didn’t exist before 1713. When the procession for conveyance, consisting of a palanquin carrying the portrait, ministers, armed soldiers, and a court musical band, set out for Ganghwa Island from the palace, the crown prince and officials in formal robes paid their utmost respect for the portrait outside the gates of the palace and bowed several times. After the new portrait was enshrined in the Jangnyeongjeon Hall, the old one was erased with water.
The portrait of King Sukjong produced in 1695, depicting him in daily robes for nobility in Joseon Korea , may have been in appearance similar to the portraits of noblemen. Over time, however, the portrait that made him look quite ordinary would have been no longer valuable to him. The fact that King Sukjong officially produced the portraits of himself in royal attire in 1713 clearly proves that he would have realized the significance of a king’s portrait distinctly demonstrating the ruler’s authority and power. The king’s portrait in the Joseon dynasty manifesting his absolute superiority and dignity finally turned into the king itself.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37 | 0.37 | 0.47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46 | 0.45 | 0.903 | 0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