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윤치호와 미국 남감리교 선교 = 개성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6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35-171(37쪽)
제공처
소장기관
1885년부터 1893년 가을까지 중국과 미국 남부에서 유학한 윤치호는 귀국 후 개성상인들의 풍부한 자본과 상재(商材)를 조선의 산업발전에 이용하기 위해 남감리교의 개성선교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 남감리교는 남부의 발전을 위해 흑인선교와 아프리카 선교에 몰두하였으므로 아시아 선교는 소극적이었다.
중국 선교부와 윤치호의 노력으로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으나 남감리교 선교본부의 지원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였다. 더구나 조선에 파견된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중심 말씀 중심의 선교를 고집하여 윤치호가 계획한 조선 근대화를 위한 개성 선교는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
윤치호는 남감리교 중국 선교부의 선교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개성으로 이주하여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농업중심의 실업교육에 나섰다. 윤치호의 실업교육은 농업을 육성하여 생산을 증진하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중농주의 산업화였다. 그러나 농업중심의 실업교육(반공과)은 일제가 제정한 ‘사립학교령’과 ‘개정 사립학교령’에 의해 공업부로 재편되어 일제가 요구하는 노동자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한영서원의 실업장은 선교사들의 주도로 근대 공장으로 변모하였으나 조선의 산업화를 견인하지 못하고,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제공하는 선교부의 공장으로 전락하였다.
1907년 안창호와 손잡은 윤치호는 개성상인들을 민족자본가로 결집하려는 ‘신민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치호는 모범촌을 만들고 개성상인들을 모범촌에 참여시킴으로 ‘신민회’ 회원을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교본부의 지원이 미진하여 모범촌을 설립하지 못했고 산업화의 방법도 제시하지 못하여 이재에 명민한 개성상인들의 참여를 도출하지 못했다. 그래도 윤치호는 미국을 방문하여 선교본부의 지원을 호소하고, 학생 YMCA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개성상인들의 ‘신민회’ 참여를 끝내 유도하지 못했다. 윤치호가 추진한 개성상인들의 민족자본가화는 실패하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윤치호가 파트너로 설정한 개성상인들이 조선의 근대화운동을 외면한 이유는 개성상인들의 자본이 토지와 대부업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성상인들은 일제의 조선미 수탈정책과 인삼전매제도 그리고 금융경영에 편승하여 인삼과 미곡 중심의 토지 경영과 고리대금업에 안주하면서 산업자본가로의 변신을 외면하였다. 그러므로 개성상인을 근대화의 파트너로 선택한 윤치호는 개성상인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종교운동과 교육운동 사회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개성상인들의 변화를 기다렸다고 하겠다. 윤치호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 민족 발전에 투신할 기독교 자본가의 출현을 남감리교 선교를 통해 도모하였으나 선교와 변혁의 대상이었던 개성상인들은 윤치호의 노력을 외면하였다.
윤치호는 유학시절 입장료를 내면서 쫓아다녔던 존스(Samuel P. Jones :‘남부의 Moody’로 불림)의 부흥운동이 조선에서도 재현되어 라이먼(T. G.Ryman)과 같은 희생적인 자본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윤치호가 간절히 바라던 조선의 근대화는 이기적인 식민지 토착자본의 논리와선교사들의 자기편의적 선교정책 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둘러 싸여 갈 길을 잃었다고 하겠다.
After studied in China and America from 1885 to 1893, Yun
Tchi-ho(Yun) came to Korea and promoted the Mission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MECS) in Gaeseong. Through the Mission of MECS Yun wanted to modernize Korea with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Say in other words, in order to develop the agriculture and industrialize the Korea, Yun chose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to utilize their capital and abilities of management.
But the South(America), defeated in Civil War, wanted to reconstruct the economy of the South. In oder to develop the economy and prevent the Blacks’ emigration, the South made an investment in Black and Africa mission. Since the resources of MECS were exhausted and they hated Chinese, the Mission of Asia were difficult and Korean Mission were more difficult. Besides korean mission in Gaeseong region was more difficult for the policies of missionaries.
Missionaries wanted to take mission in Seoul and evangelize instead of setting up the schools and dispensaries.
In oder to enlarge the mission of MECS in Gaeseong, Yun emigrated to Gaeseong and erect the Anglo-Korean School. Through teaching the agricultural and the industrial skill, Yun wanted to modernize korea. By the way Japanese ‘Law Governing Private Schools’ was distorted the education of skills in Anglo-Korean School. Skill for agriculture was changed into skill for factory. Also the policies of missionaries were distorted the skill education. C. H. Deal(teacher in Anglo-Korean School) changed the manual factory into machine industry. In spite of exporting the cotton textile, the machine industry was not developed the korean cotton textile industries.
And Yun Participated the New People’s Society to gather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Also Yun wanted to make them into national capitalists. But they disregarded the Yun’s efforts and went on board japanese’ appeasements in production of rice, ginseng, and loan markets.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did not want any economical damage. By the japanese’ colonial oppression,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self-centered minds and the egoistic missionaries’ policies, Yun’s efforts of korean modernization were failed.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