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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 The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early laymen leaders in Korean Cat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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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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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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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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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천주교는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들과 달리 정약종은 도교(道敎)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후에 신앙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온 그들은 복음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아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권일신은 적극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했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여러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명도회장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정약종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천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은 부친의 박해를 받아 집안에 감금되어 1785년 죽음을 당하였다. 1791년 권일신은 정조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지만, 유배 도중 죽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 이후 1801년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1801년 박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闢異文)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되었고, 1795년에는 〈유혹문〉(?惑文)을 지어 교회를 떠났으나,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정약종은 1801년 박해를 받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하셨는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Catholic was introduced into this land thanks to the early laymen leaders’ respondence to God’s providence. It was approached not from missionaries, but from their own spontaneous passion and endeavor. If we look at the motive of religious belief, it was Lee Byeok who changed the interest of Western Learning into Catholic religious belief. And with his suggestion, brothers Lee Seung Hoon and Kwon Cheol Shin accepted the gospel. Different from them, Jeong Yak Jong felt doubt about Taoism and then accepted the gospel later. Three of them were baptized by Lee Seung Hoon, and they baptized many people afterwards ; so the number of believers increased up to 4,000 people in 5 years. Their vibrant activity is the merit of Korean Catholic church.
These people, who entered into the God’s church through baptism, developed and spreaded religious belief. Lee Byeok spreaded the gospel to those who came to him and by visiting others. Lee Seung Hoon left the church when the persecution was fierce, but when the dust settled, he came back. Kwon Il Shin tried to spread the gospel enthusiastically and when the community was in hardship, he tried to cope with it responsibly. Kwon Cheol Shin had much influence on his relatives and students through his religious life until 1791 and it led to creating communities in many places. Jeong Yak Jong embodied the life for human equality and dignity in the hierarchical society, and it became the impetus to the entire religion. He also devoted himself to the community by serving as a leader and wrote Catechism.
In the journey of spiritual life, these people who left a mark of great virtue suffered from prosecution that occurred in 1785, 1791, 1795, and 1801 and had to endure temptation. Lee Byeok died in 1785 while being locked inside of his house under the persecution from his father. In 1791 King Jeong-Jo conciliated Kwon Il Shin and he was put in the situation where he could not make a virtuous decision so he made Hoeomun to deny his religious belief but he died on the banishment. Kwon Cheol Shin stated that he did not have religious life from 1791 until 1801, but due to persecution he died in 1801. Lee Seung Hoon built Byokimun in 1785, was removed from public office in 1791, and the he left the church in 1795 upon building Youhogmun. he came back to the church when the dust settled. Jeong Yak Jong was faced with the fear of death because of persecution in 1801, but he had a courage to protect religious belief and the church community by giving on his life. However, Lee Seung Hoon, Kwon Cheol Shin and Kwon Il Shin stated that they had rejected their religious belief temporally and left the church. Their attitudes were regrettable but it does not make them disgraceful, because God chose Peter who denied the God, but later he became the big pillar of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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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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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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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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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48 | 0.48 | 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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