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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 =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Youngdong area and the Application of Cultural Content in Youngdong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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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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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4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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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s aimed at examining the development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Youngdong area and presenting ways to promote cultural contents. Youngdong, one of areas in Chungcheongbuk-do Province, has a regional characteristic from the three areas of Jeolla-do, Gyeongsang-do, and Chungcheong-do province which was suitable for the performance of propagation of religion oppressed by the government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Donghak appears to have been introduced to the Hwangan area since the early days of Changdo. However, full-scale activities began in 1887 with the introduction of Jae-byeok, Jo. The bridge over the Yeongdong and boundary of Hwanggan was extended to the Cheongsan, Okcheon, Boeun, Geumsan, Jinsan, and Gosan, which making it a powerful bridge. Based on this, Cho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Gongju Assembly, Samrye Assembly (1892), the Gwanghwamun Joint Appeal and the Boeun Assembly (1893). On March 8, 1894, the prelude to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held in Jinsan and Geumsan where King Jae-byeok, Jo was captured. In September, about 10,000 East-Eastern farmers in the Yeongdong area came together to seize and arm by themselves. Byung-hee, Son separately led 10,000 Donghak Peasant in Gyeonggi & Chungcheong area and advanced to Nonsan, joining Bong-joon, Jeon and Donghak Peasants in Jeollanamdo Province to form a coalition and launch the attack to Gongju Castle. During this time, the unit of Donghak Peasant of Hwanggan Okcheon, and Youngdong defeated local soldiers at the Hoedeok area and advanced to Daegyo located northeast of Gongju. Donghak Peasants, who lost the fight against Japan, joined the main team led by Byunghee Son. When Donghak Farmers entered into Gongju in the Youngdong area, Gyeom-jae, Lee a former prison officer, fought with Donghak Peasants in Seokseong-ri, Jung-gu on November 5, killing 40 people. Donghak Peasants’ Army in Chungcheong area retreated from Woogeumchi, Gongju to Imshil’s Saeok, which was defeated by Japanese new weapons. In this case, Donghak Peasants’ Army meets Si-hyung, Choi a second-generation teacher, moves north along the Sobaek Mountains, takes 18 major and small battles, and takes over the Youngdong Hwanggan government. They have a big fight at the Yongsan Market Place, and Bob enters back into the Booksil, Boeun and loses huge one. As the core forces of Donghak Peasants’ Army declined, the Japanese army of local conservatives and local militias staged a crackdown on Donghak Peasants, and many of them were arrested and executed. Other than Jae-byeok, Jo as the leader of Donghak in Youngdong area, there are Pan-seok, Lee ·Chul-joong, Kim·Tae-pyeong, Kim·Go-mi, Kim·Aun-soon, Bae·Kwang-bong, Park·Il-hoe, Song·Il-chang, Song·and Hak-gil, Bae. The cultural contents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Youngdong area should be approached through comprehensive measures such as storytelling, re-adjustment of historical sites, promotion of local history& education activities, and development of research courses.
더보기이 연구의 목적은 충청북도 영동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콘텐츠화 방안을 마련하는데 있다.
충청북도 영동은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접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조선 말기에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종교 동학이 포덕 활동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황간 지역에는 동학이 창도 초기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1887년 조재벽의 입도로 비롯되었다. 조재벽의 포교 범위는 영동 황간경계를 넘어 청산 옥천 보은 금산 진산 고산 지역으로 넓혀서 막강한 교세를떨쳤다. 조재벽은 이런 교세를 기반으로 교조신원운동인 공주취회 삼례취회(1892년), 광화문복합상소와 보은취회(1893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94년 3월 8일, 조재벽 접주는 금산에서 기포하여 금산 진산에서 기포하여 전투를 치러 동학농민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9월 재기포 시기에는 영동 황간 지역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일제히 일어나 영동 황간 관아를 점령하여 무장한 뒤 진을 쳤다. 이와는 별도로 손병희가 1만 명의 경기 충청 지역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으로 진출하여 전라 지역 전봉준 동학농민군과 합류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여 공주성 공격에 나섰다.
한편, 이와 같은 시기에 영동 황간 옥천의 동학농민군은 회덕 지명장터에서지방군을 물리치고 나서 공주 동북쪽 대교로 진출했다. 대교전투에서 패한동학농민군은 손병희가 이끄는 본진에 합류했다.
영동지역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들어간 시기에 교도대 대관이었던 이겸재가 11월 5일 청산 석성리에서 동학농민군과 싸움을 벌여 40명을 포살했고, 11 월 8일에는 양산장에서도 동학농민군과 싸움을 벌여 50 명을 포살했다.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 신무기에 눌려 크게 패해 임실 새목치까지 후퇴했다. 여기서 동학농민군은 2세 교주 최시형을 만나 소백산맥을 따라 북상하면서 18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고, 영동 황간 관아를 다시 점령한다. 이들은 용산장터에서 큰 싸움을 치른 뒤, 보은 북실로 들어가 크게패한다. 동학농민군 중심 세력이 쇠퇴하자 지역 보수층을 중심으로구성된 민보군, 지방군 관군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섰고, 영동 황간지역의 많은 동학농민군이 체포되어 처형됐다.
영동지역 주요 동학지도자로 조재벽 외에 이판석, 김철중, 김태평, 김고미, 배순안, 이관봉, 박추호, 송일회, 손해창, 백학길, 강팔석 등 많은 지도자들이활동했다.
영동지역 동학농민혁명사의 효과적인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은 연구에 이어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한 스토리텔링화, 사적지 정비, 향토사 홍보 및 교육 활동, 답사코스 개발 등 종합적인 대책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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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12-2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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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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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 | 0.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5 | 0.797 | 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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