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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의 중국 국민혁명군 경험과 '국방개론' 저술 = General Kim Hong-il's Experience of National Revolutionary Army of the Republic of China and the Process of Formation on‘WehrStaat’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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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48년 8월 한국군이 창설된 시기 김홍일의 군사경험과 국방이론에 주목한다. 그리고 김홍일의 중국 국민혁명군 경험을 살펴보고 그의 국방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선행연구에서 국방 문제는 주로 일제시기 또는 박정희정부시기로 양분⋅집중되어 있었다. 양 시기의 논리를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한국군의 군사 사상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서는 한국군이 창설될 1948년 전후의 시기에 주목해야한다.
국방의 건설이라는 담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훈을 바탕으로 본격화된 논의이다. 국방은 총력전을 대비하기 위해 평시부터 전시를 준비하는 것이다. 국가 중심의 강력한 통제경제하에 군사를 중심으로 경제와 정치를 통합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폭력성을 수반한다. 국방을 건설하는 논의의 기원은 독일이며, 루덴도르프가 가장 유명한 일례이다. 동아시아에서는 1920년대 이래 일본이 수용⋅발전시켰다. 일본에서는 일군의 ‘총력전장교’들이 추동하였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1930년대 이래 이들을 참고하며 국방 건설을 목표했다.
김홍일은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복무했다. 군벌에 대한 북벌전쟁, 공산당에 대한 초공작전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항일전쟁에 모두 참여했다. 여기서 그는 주로 군수참모로 복무했다. 일선의 장교부터 시작하여 중일전쟁이 끝날 때는 국민혁명군 소장이 되었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김홍일의 이력은 그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 군정부 기관에서 군수참모로 복무한 점이다. 또한 장개석 정부가 총력전 관료를 여산훈련단, 군사엘리트코스인 육군대학교의 수학배경 역시 연구하였다. 그가 체득한 국방 이론은 중국 국민혁명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다. 또한 이의 계보적 연원은 궁극적으로 독일과 일본의 국방 이론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1948년 한국 정부 수립과 한국군 창설 이후 김홍일은 귀국했다. 그는 한국군에 창설 과정에 일부 참여했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시기 김홍일은 『국방개론』을 작성했다. 이것은 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한 책이었는데, 대중에게 판매되었다. 이 책을 중심으로 김홍일의 국방 이론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김홍일의 국방이론은 신행 한국군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이 국방을 건설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여, 강력한 통제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그리고 군사를 중심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가 조직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고국방위원회의 운영을 주장했다.
김홍일의 계획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시작부터 모순을 가지고 있엇다. 김홍일은 한국이 국방을 건설하기 위해 미국의 ECA 원조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ECA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반공주의와 봉쇄전략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원조는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북한에 이데올로기적, 심리적 압박 수단이었다. 결국 김홍일의 국방론은 채택되기 어려웠다. 미국의 관점에서 김홍일의 논리는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김홍일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국방 이론은 단절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자립경제의 달성, 사회의 군사화, 극도의 효율성 추구라는 국방의 테제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이다. 보편적으로 국방 이론은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이후 수정자본주의의 한 방법으로 이해된다. 이 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급진적인 발전 전략이다. 또한 중국과 한국처럼 탈식민지 국가에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지름길로 생각되었다.
This article throws light on the military experience and national defense theory of Kim Hong-il by examining the formation of his defense theory during his career in the National Revolutionary Army of the Republic of China. While previous research on national defense has focused either on the Japanese occupation or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era, this paper directs attention to the period around August 1948, when the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were established. This approach is expected to bridge the two separate time periods and facilitate the understanding of Korean military ideology as a continuous theoretical development.
The discourse on building national defense, or Wehrstaat, emerged from the lessons of war in the aftermath of World War I. In the era of total war, it meant making preparations for war in peacetime. It required the integration of state-controlled economy with politics for military ends, the process of which involved violence. The theory of Wehrstaat was put forth by German theorists, most notably by Erich Ludendorff. In East Asia, Japan adopted and expanded on it from the 1920s, a change urged on by a group of “total war officers.” From the 1930s, the Nationalist Party of China (KMT) drew from these sources in its attempt to build its own national defense.
During his service with the KMT Revolutionary Army, Kim Hong-il took part in the Northern Expedition against regional warlords, Encirclement Campaigns against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and the Second Sino-Japanese War against the Imperial Japanese Army. He started out as an officer on the front, gradually rising to the rank of brigadier-general. It is noteworthy that throughout his military career with KMT, his responsibility was in supply and logistics. He served as quartermaster for a subsidiary organization to the Ministry of Defense within the Military Commission. Kim Hong-il mastered national defense theory at Lushan summer training camp, and later at the Military University in Chongqing. The KMT version of national defense he was taught could be traced back to Japanese and German Wehrstaat theory.
Kim Hong-il returned to Korea in August 1948, shortl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Armed Forces. He participated in the early organization of the army and was appointed principal of Korea Military Academy. Around this period, he wrote Introduction to National Defense as a textbook for the cadets, but it was also available for purchase to the general public.
Kim Hong-il’s national defense theory had been formulated for the newly-created Korean army. He argued for a strong state-controlled economy in order to build national defense. It was his belief that every sector of society should be re-organized around the military. He advocated the installation of a Supreme Commission of National Defense to oversee this process.
Unfortunately, Kim Hong-il’s scheme was impractical from the beginning. He wanted to use US assistance via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ECA) to implement his plans. However, ECA aid in East Asia in the 1950s operated on the level of enhancing agricultural productivity in underdeveloped countries. It was unlikely that Kim Hong-il’s proposal could be adopted, since the underlying logic of his scheme would have been unacceptable to US authorities.
Nevertheless, it cannot be said that the theoretical tradition of national defense was lost in Korea after Kim Hong-il. The national defense ideals of militarization, economic independence and maximum efficiency are some of the most contentious topics in modern Korean history. In general, national defense theory can be understood as the military aspect of revised capitalism after World War I and the Great Depression. It was a radical development strategy deployed by latecomer capitalist countries, as well as an effective shortcut to nation-state building in postcolonial countries like China and Korea.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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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7-10-23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미등록 -> Military History Institute, MND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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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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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9 | 0.69 | 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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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 | 0.6 | 1.024 | 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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