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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學派와 初期 基督敎 硏究 = Study for Gang-hwa-hak faction and early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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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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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측면에서 강화역사는 우리민족의 국조신앙(國祖信仰) 단군(檀君) 신앙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대시대부터 참성단의 제천(祭天)의식을 통하여 형성되는 하늘 숭배시장은 강화종교의 뿌리가 된다고 하겠다. 어느 지역보다도 융성하게 발달되었던 고려시대의 불교와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강화 지역 종교발전의 큰 줄기를 형성한다. 특히 조선후기 강화를 중심으로 발전한 양명학은 독특한 학풍과 학맥을 이루며 ‘강화학파’라는 업적을 남겼다.
19세기 말, 강화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급속히 전파되는 현상을 보였다. 이는 강화인의 유달리 깊은 영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특히 바로 전부터 꽃을 피우고 있던 강화학파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실사구시’의 양명학이 기독교의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실천적 신앙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강화 최초의 기독교 전파의 주인공은 양사면 교산리의 이승환이란 농민이었다. 1892년 미국인 선교사 조원시(趙元時 G. H. Jones)가 강화 남문을 통하여 강화읍성에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려다 조선 관리의 거절로 실패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강화의 사회상황이 중앙정부의 쇄국주의 정책이 강력한데다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양과의 싸움으로 강화 사람들이 많은 시달림을 겪어 왔고, 봉건적 유학자들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시기여서 조원시가 당당하게 강화도성에 입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천 내리교회에 다니던 이승환이 자기고향에 내려와 모친과 가족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 이어 한학 자 초시 김상임(金商霖)과 한학자 박능일(朴能一)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급속하게 지식인층으로 확산되었다. 지식인층으로의 확산은 곧 바로 전 강화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이 결과 1893년 교항교회 설립 17년 후인 1910년에 39개 교회와 교인수 3,230명으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독교가 갖는 종교적 특성 즉, 강한 전파력과 적극적인 선교 방법 외에 특별한 요인이 있다. 당시 강화지역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진위대장 출신 이동휘(李東輝,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비롯한 유경근, 윤명삼 등 지역의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점과 ‘강화 6군자’ 김용하 전병규 등 지식인들이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이들이 교회를 통하여 교육운동과 사회개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양태의 특징 중 하나인 일지돌림 신앙은 강화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에다. 기독교 교리적으로 중생(重生) ‘다시 태어남’과 신생(新生) ‘새로 태어남’의 의미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 한 형제’라는 의미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교동지역 교인들의 신자돌림과 하와이 이민자들도 같은 의미에서 개명하였다.
또, 이름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운영하는 학교도 ‘강화합일학교’, ‘흥천합일학교’, ‘집일학교’ 등 일자돌림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던 것이다. ‘합일(合一)’이란 뜻은 강화학파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서 나온 말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 이미 강화학파의 사상과 철학이 체득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강화 기독교의 개척자 김상임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부패한 관리와 세태를 보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는 그의 기독교 개종 이전의 일로 자신의 학문탐구와 사회관에 있어 강화학파의 ‘사회개혁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한다.
홍천교회와 흥천합일학교 설립자 김용하와 전병규는 ‘도학자’, ‘군자’ 등으로 호칭될 정도로 강화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학문적으로 ‘주자학’에 근접하였을 것이나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학교이름을 ‘흥천보창학교’에서 ‘흥천합일학교’로 개명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강화학파 학풍에 호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재(城齋) 이동휘는 아호를 강화학파 학자들과의 같은 재(齋)자 돌림으로 지은 것으로 보아 강화학파 학자들과 많은 교류와 학문적 공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김종우 역시 아호를 하곡 정재두와 같은 곡(谷)자 돌림으로 지었고, 하곡 선생이 살던 마을과 이웃에서 출생한 점, 영재(寧齋) 이건창 선생의 묘소와 인근 마을에서 살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강화학파와 갚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In the aspect of religion, the history of Ganghwa started from Dan-Gun(the founding father of Korea). From Goryeo Dynasty, Korean people paid a service to Heaven, which can be said Ganghwa religion was rooted from Heaven worship. In particular, Yang-myeong-hak was developed in Ganghwa district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established academic features and tradition.
In the late 19th century, Christianity was introduced and spreaded rapidly. One of the reason why Ganghwa could accept the Christianity was from Gang-hwa-hak faction. It seemed that Sil-Sa-Gu-si of Gang-hwa-hak faction was associated with Ji-Haeng-Hap-il, meaning knowledge and conduct are united.
The first person who propagated Christianity was Lee, Seung-hwan who was a farmer. G. H. Jones carne to Ganghwa-eup through Gang hwa South Gate in 1892 and tried to spread christianity, but he was failed because Gang hwa public official strongly refused it. At that time, Korea took strong isolation policy due to Byeonginyangyo, Franch disturbance of 1866 and Sinmiyangyo, American disturbance of 1871. That’s why christianity could be accepted.
Lee, Seung-hwan who was a person of Naeri church of Incheon carne back to his hometown and read the Bible to his family and later some of intellectuals convened to christianity and it started to spread rapidly. As a result, there were 39 churches established and 3,230 people went to church in 1910. It shows fast-growing christianity society.
Except active missionary work, there was a panicular reason how christianity could widely spread in Korea. Lee, Dong-hwi who had a considerable power in Ganghwa and some leaders of Ganghwa convened to christianity as a pan of the campaign for liberation of the oppressed people. Additionally intellectuals such as Kim, Yong-ha and Jeon, Byeong-Gu also changed their religion to christianity and they tried to educated people and renovate the society.
There are some characteristics shown for early Christian of christianity. First of all, they tried to show their faith in christianity by remaking their name. Their name usually meant “rebirth”, and “newborn” and one family under God. Second, they changed the school names that ran by to “Ganghwa Hapil School”, “Heung cheon Hapil school”, and “Jip Il school”. “Hapil” is the word that Gang hwa school stressed.
It proven that christians already learned the philosophy of Gang-hwa-hak faction. Lee, Dong-hwi used his pen name that was same with Gang-hwa-hak faction and it seemed that he exchanged and sympathized a lot of things with Gang-hwa-hak faction. Kim, Jong-hu also used his pen name which was same with Jeong, jae-Doo, and he also was born in Jeong, Jae- Doo’s neighboring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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