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와 교황청 개혁의 시도들에 대한 연구 = La ricerca sui tentativi riformistici del papato e dei vertici nel XVI secolo
저자
김태형 (대구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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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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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200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07-152(46쪽)
제공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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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icerca sui tentativi riformistici del papato e dei vertici nel XVI secolo
E` noto il detto Ecclesia sempre reformanda. Vuol dire che la chiesa e` una realta` vivente. Essa concesce il bisogno continuo di realizzarsi, perche´ sono presenti due principi opposti: "in ecclesia nunquam defuit nec unquam deerit iniquitas premens et iustitia patiens" e "Ecclesia praesens continet civitatem Dei et civitatem diaboli".
La coscienza della non corrispondenza al suo "dovere essere" costituisce per la Chiesa un sentimento profondo. Queata coscienza convocava un sentimento di rinnovazione per la Chiesa, e di conseguenza aveva realizzato i risultati e I tentativi di riforma. Qundi il concetto di riforma non e` una categoria astratta, uno strumento inerte, ma un criterio funzionale per comprendere in modo adeguato la storia della Chiesa nel tempo.
Dopo la meta` del XIV secolo sulla necessita` della riforma erano tutti d'accordo. Sopratutto bisognava cominciare "reformatio in capite". Perche` la Chiesa perdeva poco a poco coraggio del suo ruolo apostolico. Tuttavia dopo Basilea il papato continuando conflitto contro conciliarismo avrebbe dovuto diminuire il dirrito concilio e pottuto prendere l'iniziativa della riforma.
Per incarico di Pio II Domenico de'Domenichi aveva preparato un importante trattato riformistico, il 'De reformationibus curiae romanae'. In esso il de'Domenichi consiliava l'ablizione del cumulo dei benefici, del lusso e dei banchetti della curia. Inoltre suggeriva la creazione dei una commissione di controllo dell'operato degli ufficiali di curia per frenarne l'avidita` e abolire la venalita` degli uffici. Suggeriva anche di imporre ai vescovi la residenza.
Sempre per Pio II Nicolo Cusano aveva redatto un memoriale di riforma; in esso si consiliava l'abolizione del cumulativismo beneficiale, la cura degli ospedali, la vigilanza sui venditori di indulgenze e reliquie, la repressione delle superstizioni, e sregoneria, la visita dei monasteri femminili. Proponeva di attuare un'azione chirugica per allontanare i funzionari corrotti della curia chiedenda ai curiali l'osservanza dei loro doveri ecclesiastici.
I sccessori misero da parte questi progetti. Solo per un momento li rispolvero` Alessandro VI dopo la tragica morte de figlio Giovanni e il crollo di un soffitto del palazzo papale. La bolla di riforma e` stato preparato, ma la bolla non fu mai pubblicara e la riforma rimase lettera morte.
Nel 1513 i due camaldolesi Giustiniani e Querini avevano presentato un memoriale di riforma che prospettiva un programma milto ampio, 'il Libellus ad Leonem X'. La necessita` per il Papa di rinunciare al suo rolo politico, ma di riformarsi e di mettere al centro del suo governo il servizio apostolico.
Il tentativo di riforma fu fatto dal concilio Lateranese V(1512-1517). Nel discorso inaugurale Egidio da Viterbo fece osservare che "gli uomini debbono venir trasformati dalle cose sante e non le cose sante dagli uomini". L'opera di riforma doveva rinnovare la Chiesa perche´ fosse pronta a evangelizzare I nuovi spazi che si aprivano in America. Per realizzarlo la Chiesa avrebbe dovuto sciogliersi dall'abbraccio delle potenze europee e curare la formazione del clero indigeno. Consigliavano di formare il clero non sulla scolastica, ma sulla Sacra Scrittura, che avrebbe dovuta essere tradotta in lingua viva, sui Padri e Concili. Sugerivano un più attento controllo dei candidati agli ordini, la riforma dei religiosi, l'unione dei Benedettini, l'introduzione della lingua nazionale nella liturgia, la convocazione di sinodi e di concili ecumenici ogni cinque anni, la visita alle diocesi da parte di legati pontifici.
Il concilio pero` non fu cosi coraggioso. Approvo` qualche buon decreto sulle tasse curiali, sulla nomina dei vescovi, sull'istruzione religiosa, sui monti di pieta`, sulla censura dei libri e della predicazione. Si curo` cosi con medicine molto banale un malato grave, ma non si ville asportare il tumore. Non si fece nulla contro il cumulo dei benefici, contro la mancanza di residenza e il lassismo di tanti ecclesiastici.
Paolo III nomino` allora una commisione in cui non inserì nessun canonista, quasi a lasciare libero campo ai riformatori. Nel 1536 da questa commisione veniva un documento riformistico molto ampio il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 Grazie a questo documento, anche in curia il discorso riformistico non poteva essere piu` accantonato. Paolo III da parte sua non fece molto. gli manco` il coraggio di applicarlo. Forse nummeno poteva. Almeno non gli manco` il coraggio di convocare il concilio, che finalmente avrebbe attiato una riforma a largo respiro.
Dopo Trento, il vescovo npn potra` piu`essere un "bie muto", un damerino imbrociato, un signore ingioiellato, un umanista immerso in profonde letture.
Il nuovo vescovo dovra` avere le caratteristiche: residere e non cumulare benefici. Le conseguenze saranno l'impegno per la formazione del suo gregge e del suo clero attraverso i sinodi, le visite, i seminari. Dovra` essere un modello di pastorialita`, di autorevolezza, di paternita`. I preti dovranno essere pasori capaci di vivere accanto al gregge, uomini casti, seri, zelanti nell'annuncio della Parola, ferventi nella preghiera, particolarmente nella Messa, solleciti nella catechesi e nell'amministrazione dei sacramenti.
La Chiesa del XVI secolo a Trento e con Trento si mise in moto un processo di rinnovamento, gia` in atto, per la verita`, che riguardo` le strutture di governo e la prassi pastorale, la teologia come la liturgia. Fu un rinnovamento sempre in essere, per una realta` che non ha mai finito di nascere. Pero` queta riforma aveva una serie di tentativo. cioe` aveva una preparazione. Quindi la riforma di Trento e` il risultato di questi tentativi antecedenti delle riforme.
"현존하는 교회는 악마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를 포함한다"라는 원칙과 "교회에는 한 번도 정의와 불의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라는 두 개의 원칙이 늘 현존하기 때문에 교회가 새로운 활력을 다시 가져야 되고 항상 개혁하는 교회로 존재해야 될 필요성이 계속 인정되어 왔었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교회의 존재 의무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교회는 늘 인식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인식은 교회를 위한 쇄신의 의식을 불러 일으켜 끊임없는 개혁의 노력과 그 결실을 이루어왔다. 따라서 개혁의 개념은 시간 안에서 교회의 역사를 적합한 방법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이라 할 수 있다.
1400년대 중반이후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했다. 특별히 ‘위로부터의 개혁’이 요구되어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조금씩 사도적 사명의 용기를 잃어가면서 세속화되어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은 바실레아 공의회 이후 공의회 주의자들과 맞서서 투쟁하면서 공의회의 권한을 축소시켜야만 했고, 공의회가 아니라 교황이 개혁의 주도권을 쥐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들은 교회의 개혁을 위한 시도들을 하게 되었다.
먼저 비오 2세와 더불어 도메니꼬 데 도메니끼의 중요한 개혁 논문인 '로마교황청 개혁에 대하여'가 준비되었다. 데 도메니키는 특전들의 축적을 없앨 것을 권고했고, 교황청의 축전 행사들과 사치를 없앨 것을 충고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청 사무소들의 부정과 탐욕을 멈추게 하기 위해 그 일을 조절하는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충고했다. 또한 주교들에게 거주의무를 지킬 것을 명령하도록 조언했다.
또한 비오 2세를 통해 니꼴로 쿠사노는 개혁에 관한 탄원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 안에서는 특전들의 수많은 축적주의의 소멸, 병원들의 관리, 대사들과 유물들의 판매자들에 대한 경계, 마법과 신성모독자들의 억압, 수녀원 방문을 권고했다. 그리고 교황청 직무자들에게 그들의 교회적 의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면서 교황청의 부패한 공무자들을 내쫓기 위해 외과 수술을 하기를 제시했다. 후계자들은 이런 계획을 부분적으로 실천했다.
이 계획은 알렉산드로 6세가 그의 아들 간디아의 공작 요한의 비극적인 죽음과 교황궁전 지붕의 붕괴 이후에 잠시 동안만이라도 교황청을 일신하도록 했다. 개혁 교서는 준비되었지만 이 교서는 공포되지 않았고 죽은 문서로 남았다.
1513년 두 명의 까말돌리 회원 바오로 쥬스티니아와 삐에뜨로 귀리니가 개혁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은 '레오10세에게 올린 탄원서' 란 이름으로 아주 넓은 계획을 설정했다. 특히 그들의 계획에서 교황은 이제 더 이상 황제에 대한 적대 자리로서 중세의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사도적 사명에 충실한 보편적인 그의 기능을 다시 취하도록 충고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의 시도들은 먼저 제5차 라떼란 공의회 (1512-1517)에서 그 결실을 맺는 듯이 보였다. 개회 연설에서 비테르보의 에지디오는 사람들이 거룩한 것들에 의해 변화되어야지, 사람들에 의해 거룩한 것들이 변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개혁 작업은 교회를 쇄신해야만 했다. 아메리카에 열린 새 땅을 복음화 하는데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는 유럽의 권력의 탈로부터 풀려나와야 했고, 방인 사제 양성을 배려해야 했다.
그래서 공의회는 성직자들을 스콜라 학문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성경과 교부, 공의회에 대한 공부를 통해 양성하도록 충고했다. 그리고 사제직 청원자들의 더욱 세심한 조절, 수도자들의 개혁, 분도회의 연합, 전례에 민족어의 도입, 매 5년 마다 세계 공의회와 시노드의 소집, 교황 대사들의 교구방문 등이 충고되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그렇게 용기 있지 못했다. 공의회는 몇몇 좋은 교령을 통하여 성청의 세금과 주교 임명, 수도원 설립, 자비의 은행 설립, 서적 검열과 설교 검열에 대해서만 인정했다. 이렇게 공의회는 매우 가벼운 약품으로 아주 심하게, 그러나 악성 종양을 잘라 내기를 원하지 않는 이 병자를 치료했다. 특전들의 축적을 반대해서, 그리고 거주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많은 교회 종사자들의 해이주의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병에는 더 큰 치료가 필요 했었다.
마침내 바오로 3세는 트렌토 공의회를 개최하게 된다. 공의회를 개최하기 이전에 그는 개혁을 위한 하나의 커다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개혁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위원회는 1536년 교회의 개혁을 위한 계획 '교회 수정에 대한 조언'을 작성하였고, 그 계획은 마침내 트렌토 공의회를 통하여 실현되었다. 트렌토 공의회를 통하여 쇄신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세속적이지 않고 확실하게 종교적인 교황과 사목자-주교에게서 인도된다. 쇄신된 교회 안에서 새로운 주교들은 거주의무를 지키고 부를 축척하지 않으며, 신학교를 설립하고 사목방문과 시노드를 통하여 그의 사제들과 백성들을 양성하고 이끄는 책임 있는 이들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제들은 양들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능력 있는 목자로서, 성사를 관리하고 미사와 기도에 열심하며 말씀선포에 열정적인, 신중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교회는 트렌토에서 이러한 쇄신의 움직임을 가지게 된다. 즉 교회정부 구조와 사목자들의 사목적 실천, 전례로서의 신학 등을 관계하는 쇄신 과정이 있게 된다. 하지만 트렌토에서의 이 쇄신은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개혁 고리들의 연속성 안에서 트렌토의 쇄신은 때가 차서 성숙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트렌토 공의회에서 일어났던 교회의 쇄신작업은 16세기 가톨릭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쇄신의 시도들을 거치면서 마침내 성숙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트렌토 공의회는 프로테스탄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반(反) 프로테스탄 개혁이 아니라 '항상 개혁하는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실현한 개혁 공의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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