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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군정서의 성립과 독립군단 통합운동 -총재 서일의 활동시기를 중심으로- = The Formation of Daehan-Gunjeongseo and the Military Consolidation Movement in Manchuria
저자
이숙화 (한국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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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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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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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수록면
3-58(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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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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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proves the characteristics of organization of Daehan- Gunjungseo and writes on the military consolidation which was pursued by them as a way of Independence War.
The followings are examined. Firstly, Daehan-Gunjungseo was organized during a long term anti-Japan policy and its execution by Daejonggyo. Daejonggyo founded Junggwangdan in March of 1911 and proceeded National Education Movement as a main misson. When National Self-Determination was proclaimed by Wilson, the president of USA in 1918, Daejonggyo proceeded Diplomatic movement to international societies by organizing Dongwondang with the leading member Seo-il and dispatching representatives to Peace Conference at Paris. On the other hand, Daejonggyo proclaimed Anti-Japanes Armed Struggle with the declaration of "The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round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in Manchuria and established Daehan-Junguidan as a substantial armed corps.
Secondly, Daehan-Gunjungseo was initiated from Daehan-Junguidan, turned to Daehan-gunjeongbu and had grown up the best Independence Corps in North Chientao. Daehan-Junguidan was established by association of Gonggyo and Christian. However, there were members who were opposed when Daehan-Junguidan pursued Republicanism. Therefore Daehan-Gunjeonghoi was reorganized after separating the opposition. Daehan-Gunjeongbu attempted to unify military corps. However, Daehan-Gukminhoi asserted its leadership over Independence Corps so that Daehan-Gunjeongbu changed its name again as Daehan-Gunjungseo according to the recommenda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 Shanghai. Daehan- Gunjungseo grew up to be the biggest troop in North Chientao by Kim Jwajin and military strategists from Sinheung Military School.
Thirdly, military consolidation of Daehan-Gunjungseo is examined on the epoch of Battle of Qingshanli. Before the Battle of Qingshanli, military consolidation movement was planned and lead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So it was dual system composed of Mindan(administrative organization) and Gundan(military). The Gundan was composed of Daehan-Gunjeongseo and Hong Bumdo‘s military unit. But the dual system was not the result pursued by Daehan-Gunjungseo which wanted a total consolidation. After the Battle of Qingshanli, Daehan-Gunjungseo pushed military unit again and organized Daehan-Tongeuibu. The members of Daehan-T ongeuibu moved to Svobodnyi to reconsolidate all of Independence Corps. However it was failed by ‘the Tradegy of Free City’.
Daehan-Gunjungseo failed to make total consolidation of Military Corps. But it struggled to prepare Independence War and pushed military consolidation forward. As a result, the victory of the Battle of Qingshanli was possible. However, after the Battle of Qingshanli, the result of consolidation could not be succeeded to anti-Japan resistance. Nevertheless, the struggles to make a consolidation of Military Corps is enough to be evaluated as a way of Independence Korean history for National Movement.
이 논문은 대한군정서의 성립과정과 조직의 특성을 밝히고 독립전쟁의 일환으로서 대한군정서에서 추구했던 독립군단 통합운동을 다루었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 교단에서 설립한 독립군단체이다. 선행연구들은 이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나 대한군정서 인물들의 대종교 신앙 유무만 지적하였고 대한군정서의 성립과정 및 무장활동에 있어서 대종교 교단의 실질적인 지원활동은 충분히 논의되지는 못했다. 또한 청산리전쟁 승리의 요인을 독립군단체 통합운동과 관련하여 재조명한 연구들도 있지만 통합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대한군정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규명하였다.
첫째, 대종교는 1910년대부터 대종교 교단에서 전개한 ‘민족의 역량강화’·‘외교독립’·‘무장투쟁노선’이라는 일련의 대일정책과 그에 따른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1911년 3월 중광단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중점사업으로 전개하였다. 1918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국제사회에 대한 외교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서일 등을 중심으로 동원당을 조직하고 파리평화회의에 대표파견을 지원하였다. 1919년 3.1만세시위운동 전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최종적으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무장단체로서 대한정의단을 설립하였다.
둘째, 대한정의단은 대한군정부로 재편된 뒤 북간도 최고의 독립군단체 대한군정서로 성장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5월에 공교도·기독교와 연합으로 설립하였다. 1919년 9월 대한군정부로 재편하고 ‘통일주의’에 따라 북간도 독립군단체의 통합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부는 1919년 12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서일을 중심으로 하는 군무 중심의 총재부와 김좌진을 중심으로 장교양성 및 군부대를 지휘·운영하는 사령부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지방조직에는 대종교 신도와 연계한 39개의 경신국을 조직하여 간도 전 지역의 통신과 경찰업무를 관할하며 북간도 최대 최고의 독립군단체로 성장했다.
셋째, 대한군정서의 독립군단 통합운동은 통합의 주체, 통합의 성격에 따라 청산리전쟁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청산리전쟁 이전의 통합운동은 임정에서 주도하여 민단과 군단의 이원화된 체제로 결정되었다. 군단은 대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가 양립했다. 이원 체제는 대한군정서가 추구했던 통일주의에 못 미치는 결과였다. 그렇지만 홍범도 부대와 연합에 의한 청산리전쟁의 승리는 통합운동의 영향으로 평가된다. 청산리전쟁 이후 러시아로 이동과정에서 대한군정서는 서로군정서·홍범도 부대와 삼단연합을 추진하며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서는 다시 독립군단 전체와 재통합을 이루고자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자유시참변을 맞아 재통합의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서일 총재의 이후 1922년 부총재 현천묵은 대종교 간부들과 대한군정서 재건에 노력하여 1923년 김좌진의 대한독립군단과 통합하였다. 통합운동은 1925년 신민부 설립까지 이어졌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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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5-31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외대사학 -> 역사문화연구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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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5 | 0.75 | 0.6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6 | 0.49 | 1.216 | 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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