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의 재상정치활동(宰相政治活動) 연구 = A Study of Men g Sasung(Gob ul) Regarding Politi cal Achievements as a Prime Minister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7
작성언어
-주제어
KDC
810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147-184(38쪽)
KCI 피인용횟수
1
DOI식별코드
제공처
고불 맹사성(孟思誠 : 1360~1438)은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태어나 고려조에 출사하여 조선 세종대에 대성(大成)한 관리로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그는 일생동안 고려왕조에서 3명, 조선왕조에서 4명의 임금을 경험했고 세종대 좌의정으로 치사하여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맹사성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세종대 뛰어난 명재상(名宰相)이고 청백리(淸白吏)라는 것이다.
하지만 맹사성의 젊은 날은 정치적 파란에 따라 고통스런 기억이 많았던 시기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맹사성의 사환은 평탄하지 않아 13년 2개월 동 안 1번의 좌천, 4번의 파직, 2번의 유배를 경험하였다. 특히 태종 8년에 일어난 조대림(趙大臨) 사건은 가혹하여 왕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자신은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후 오랫동안 유배형에 처해졌고, 아들 맹귀미 (孟歸美)는 장사(杖死)되는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맹사성은 좌절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 원숙한 인품과 경륜을 가지게 되었다. 태종 9년에 방면된 후 재등용되고 나서는 일관하여 성실하고 조신한 태도로 국왕 태종의 신임과 사랑을 회복하였다. 항상 검약하고 청렴하며 순후(醇厚)한 자질과 성품으로 성실하게 국정에 임한 결과 태종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였고, 여러 직함의 판서직에 등용되어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세종이란 현군(賢君)을 만난 후에는 일세의 중흥을 도모하는데 큰 역할 을 수행하였다. 맹사성에 대한 세종의 믿음도 커서 맹사성은 8년간 우의정 과 좌의정 등 의정부 재상으로 복무하였다. 맹사성이 재상으로 활동한 세종 초년은 세종이 가장 의욕적으로 국정에 비전을 보여주고 활발히 국정에 임하던 시기였다. 젊고 총명하며 패기만만한 국왕 세종과 숙성하고 노련한 재상들이 협력하여 신생 조선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젊고 명석하며 패기에 찬 국왕과 원숙한 노 재상의 결합은 신생국가인 조선 왕조의 기틀을 강화하고 다지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재상시기에 맹사성이 관인으로서 보여준 모습은 백관의 사표가 되는 것 이었다. 무릇 공직에 임하는 재상이란 이래야한다는 전범이 되었던 것이다. 맹사성을 발탁한 세종의 선택은 가장 성공적인 인사(人事)였다. 세종시대의 빛나는 역사적 성과는 세종과 맹사성, 황희 같은 두 재상의 헌신적인 보필의 결과물인 것이다. 맹사성은 세종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여는데 기초를 닦는 인물이었다.
Born in a period of historic upheaval between the end of Goryeo and the beginning of Joseon Dynasty, Meng Sasung(1360~1438) was a feature who led a dramatic life, entering government service in Goryeo and attaining his great achievements in Sejong period of Joseon. He resigned as a first vice-premier in a period of King Sejong, serving for three kings in Goryeo Dynasty, and four in Joseon Dynasty in his whole life as an officer. Historic evaluation upon him is that he was a noted premier and an incorrupt officer. However, his young days were full of painful memories due to political hardshiop. In the beginning of Joseon, Meng Sasung experienced one deportation, four dismissals, and two exiles for 13 years and 2 months. In particular, in the eighth year of King Sejong, Cho Daerim s case made him put around nearby death and finally banished for a long time, and his son, Meng Gwimi had to face death as punishment. However, Meng Sasung, in the ups and downs of political turmoil, stood up from frustration and suffering and came to have a mature personality. After being recruited in the 9th year of King Sejong, the trust and love of King Taejong were reestablished and restored with a sincere and careful attitude of Meng Sasung. As a result of his steadfastness and honesty, he restored the trust of Sejong and became a successor to various noble titles. After meeting wise King Sejong, he played a major role in promoting prosperity of Joseon. Meng Sasung also had great faith in Sejong, which made him serve as a first and second vice premier for eight years as a member of the Uijeongbu. In the early years of Sejong, when Meng Sasung was a prime minister, King Sejong was the most ambitious and showed a vision to the national government and was actively engaged in national affairs. King Sejong, a young, brilliant and loyal king, and a mature and skilled officer were able to cooperate with each other to build up a foundation for the new Joseon dynasty. The combination of a young, brilliant, king and an old, experienced minister contributed greatly to strengthening and consolidating the foundations of the Joseon Dynasty, a new country.
The appearance of Meng Sasung as an official in the period of the re-establishment was to be a guiding star of all the government. He became a desirable example of what a prime minister is supposed to be. Sejong’s choice of employing Meng Sasung was the most successful. The brilliant historical achievements of the Sejong era are the result of the dedication of King Sejong and the two ministers, Meng Sasung, and Hwang Hee.
Meng Sasung was the founder of the golden era of the Sejong era cultur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38 | 0.38 | 0.3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 | 0.47 | 0.8 | 0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