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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순종의 천연두 완치 기념 계병(?屛)의 제작과 수장 = The Production and Storage of Commemorative Paintings: A Case Study of Crown Prince Sunjong`s Recovery from Smallpox in 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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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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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2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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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79년 순종(純宗, 재위 1907-1910년)이 천연두에서 회복된 것을 기념한 계병(?屛)에 대한 연구이다. 천연두(天然痘)는 치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순종의 회복은 국가적인 경사였다. 이를 기념하여 제작된 계병은 현재 2종 5좌가 알려져 있다. 첫 번째 그룹은 1875년에 거행된 순종의 책례(冊禮)를 그린 것이다. 이 유형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 1875년에 거행된 책례 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1784년 《문효세자책례계병》의 전범에 따라 도해되었다. 이는 조선의 궁중 계병이 실제의 재현보다 전례(前例)의 계보를 따르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그룹은 십장생도(十長生圖) 병풍으로 꾸며졌다. 대부분의 계병은 행사의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유독 왕세자의 책례와 관련해서는 이전부터 행사도와 함께 일반 회화의 주제가 선택되곤 했었다. 1800년과 1812년에는 요지연도(瑤池宴圖)가 책례계병으로 제작되었다. 1879년 작례도 행사도 병풍과 십장생도 병풍이 모두 계병으로 꾸며져 전대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1879년 계병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왕실 문헌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주목을 요하는 것은 궁중발기(宮中發記)이다. 궁중발기는 왕실의 행사에 소요되는 물품의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현재 1879년 계병을 언급한 궁중발기는 총 5건이 있다. 이에 따르면 1879년 순종이 완치되자 규장각(奎章閣), 의약청(醫藥廳),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승정원(承政院), 무위소(武衛所)에서 각각 대병과 중병 1좌씩을 고종과 순종에게 올렸다. 합산하면 고종에게 12좌, 순종에게 12좌의 계병이 헌상된 것이다. 이 중에는 십장생도뿐만 아니라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문방사우도(文房四友圖),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경직도(耕織圖),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등 다양한 화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계병들은 1880-1881년 사이에 대전(大殿)과 세자전(世子殿)에 딸린 병풍고(屛風庫)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후 1905-1906년에는 별고(別庫)라는 곳에 1879년 행사도 계병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879년 계병이 제작된 지 25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왕실의 관리 하에 궁내에 수장되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1879년 계병에 대한 문헌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계병채(?屛債)를 요청하는 서간들이다. 이 서간들은 예문관(藝文館), 규장각, 승정원에서 증산현감(甑山縣監) 이헌기(李憲基, 1819-1891)에게 계병의 제작비용을 요청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궁중계병은 왕실의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방관들이 비용을 갹출하였다. 이를 통해 왕실의 경사를 신하들이 축하한다는 명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앙 부처에서는 왕실의 행사를 마치고 나면 먼저 계병채를 대납한 후에 지방관에게 이를 요청하였다. `선 대납 후 수금`체계는 비록 지방관에게는 부담이 되었겠지만 계병 제작의 전통이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효과적인 방편이었을 것이다.
본 논문은 1879년 계병이 어떤 절차를 거쳐 주문, 비용의 확보, 제작, 분상(分上) 관리되었는지를 추적한 결과이다. 1879년 작례는 유물과 문헌이 부합하는 드문 경우이자 문헌 증거가 풍부하게 남아 있는 귀한 사례이다. 따라서 본 연구가 19세기 궁중 계병의 제작 과정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process in which a royal commemorative screen painting was ordered, produced, financed, and stored at the royal court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Even though the Joseon court had a long-standing tradition of producing commemorative paintings to celebrate royal events, very little has been known about its literary evidence regarding the practice. However, one case of a screen painting, which was created to celebrate Crown Prince Sunjong (1874-1926, r. 1907-1910)`s recovery from smallpox in 1879, provides abundant resource to shed light on the characteristics of royal commemorative screens. From productions for this event, five distinct screen paintings are currently preserved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Korea University Museum, the Jordan Schnitzer Museum of Art, and the Amorepacific Museum of Art respectively. The former three works are recording paintings to depict the Investiture Ceremony of the Crown Prince, while the latter two are those of Sipjangsaengdo (paintings of the ten symbols of longevity). In this paper, I will mainly focus on following three issues regarding 1879 commemorative screens: first, their creation; second, the storage of them; and third, the financial basis for their production.
As for the creation issue, since the Joseon court paid more attention to the inheritance of the tradition than to the real depiction of the ceremony scenes per se, the paintings of the Investiture Ceremony in the 1879 case also followed the model of precedent screens of the rituals for previous Crown Princes rather than showed the real scene from the ceremony. Also, general paintings such as Sipjangsaengdo were produced along with record paintings of the Investiture Ceremony as one set, also following the precedents of former Investiture Ceremony screens.
As for the storage issue, the royal inventory list called balgi allows us to understand that since those screens of 1879 were made as gifts to King Gojong (r. 1863-1907) and Crown Prince Sunjong, they have been stored in special screens storages of the residential palaces of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Balgi s also indicate that those screens were moved to an extra storage out of palace during 1905-1906. These facts imply that commemorative screens were managed for storage and transition under court control for at least more than 25 years after their productions.
As for the financial issue, three letters from a private collection, which are about the demand of financial aid for commemorative screens in 1879, help us to understand how the court secured the high expense for screens at every event of royal ceremonies. These sources reveal that the production of commemorative painting screens was not at court`s own expense but at local officials` in the form of an additional tax, a kind of bribery paid to the central government to maintain their local political power. This money must have been a big burden to local officials since they repeatedly made petitions to reduce this financial burden. Ironically, the practice could be maintained until the end of the dynasty thanks to this financial structure.
This study attempts to shed light on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commemorative screens by an analysis of a case from 1879. I hope that this case study will contribute to a better understanding of royal commissioned painting screens.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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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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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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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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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37 | 0.37 | 0.47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46 | 0.45 | 0.903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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