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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 3.1운동의 검토와 과제 = The Review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Pyeongtaek Area
저자
진주완 (숭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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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21-158(38쪽)
KCI 피인용횟수
2
제공처
The Review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Pyeongtaek Area
Jin, Ju-wan
This article is a review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Pyeongtaek in 1919. Before the March 1st Movement Pyeongtaek had many changes. These changes have brought benefits to the Japanese and have caused economic disadvantages to the Korean people. During this period, modern educational facilities were established in Pyeongtaek and religious people entered the area. They became the key force leading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The March 1st Movement in Pyeongtaek was reported to have lasted about a month from March 9 to April 10. During this period, independence movements were staged all over Pyeongtaek, and Japanese military & police violently suppressed them. After reviewing the data in this section, we found some areas to be reviewed in the previous study.
First, it is necessary to review the first March 1st Movement site. The report, ruling and newspaper articles writte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did not reveal the details. Second, about a third of those arrested during the March 1st Movement in Pyeongtaek were sentenced to prison, mostly farmers in their 20s and 30s. There was also some data left on the murder victims, but it was hard to trust the time and place of death.
Third, it is necessary to review the March 1st Movement-related monuments. Some sites seem different from real places. Some places were omitted even though there was ample grounds to celebrate.
Fourth, the March 1st Movement in Pyeongtaek was mainly led by students and religions. Students led the March 11 Manse Hurrah Demonstration Movement in front of Pyeongtaek Station. The Cheondogyos seem to have funded the March 1st Movement and led the protests in the background. Christianity seems to have played a pivotal role in regional links. In addition, some officials and residents staged their own Manse Hurrah Demonstration Movements. The residents seem to have joined it enthusiastically.
평택지역 3.1운동의 검토와 과제
진주완
본고에서는 평택지역 3ㆍ1운동에 대해 검토하였다. 근대 시기 평택은 행정구역의 변화, 철도의 부설, 일본지주의 진출 등의 변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소외되는 현상을 보인다. 특히 개간지의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토지를 빼앗기면서 큰 박탈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로 추정된다. 한편 평택지역에 근대적 교육기관과 천도교ㆍ기독교 등 종교계가 진출하였는데, 이들은 3ㆍ1운동 시기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평택지역 3ㆍ1운동에 대한 주요자료에 대해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평택지역 만세시위는 3월 9일부터 4월 10일까지 전개되었으나, 이 가운데 3월 9일과 10일 만세시위는 일제측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고, 유일하게 기록된 『삼일운동비사』의 경우 몇몇 부분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따라서 평택지역 최초 3ㆍ1운동지역에 대해서는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평택지역 만세시위로 인해 검거된 인물은 약 60여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3인 31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형을 선고받은 인물들은 주로 농민들이었으며 대부분 20대~30대 중반의 인물들이 많았다. 피살된 인물의 경우 해방 이후 『3ㆍ1운동 피살자 명부』를 통해서 10인의 신원에 대해 파악되었는데, 이들의 순국일자와 장소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셋째 만세시위가 일어난 지점에 대해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2009년 조사보고서를 정리하였으나 틀리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주재소의 경우 3ㆍ1운동 당시 위치와 이후 이동한 위치 간의 혼동으로 인해 잘못된 위치를 조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기존 자료를 인용,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원문에 없었던 내용이 추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3ㆍ1운동 최초 발상지로 알려진 계두봉 또는 옥녀봉의 경우 이에 해당한다. 한편 판결문에 등장하는 봉오산과 같은 지점도 사적지에 추가될 필요가 있다.
이어 평택지역 만세시위의 주도세력에 대해 정리하면 학생ㆍ종교인ㆍ관리 및 일반인들로 분류할 수 있다. 평택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동문 이도상의 주도하에 3월 11일 평택역 앞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종교인들의 경우 일제측 자료에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은데, 이는 일제의 감시로 인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자료를 보면 이들이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월 31일 북면 만세시위는 천도교 진위교구장 박창훈의 지도 아래 야막리ㆍ봉남리의 천도교도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또한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지원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경우 구체적인 활동내용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전개된 용인ㆍ안성ㆍ평택지역의 만세시위에 주도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 지역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지역적 연계에 있어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서탄면에서는 면장이 직접 만세시위를 지휘하였는데, 서탄면장 윤기선은 대한제국 시기 중앙에 진출한 바 있고, 낙향 이후 지역발전을 위해 힘쓰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와 뜻을 함께한 윤대선은 교원을 역임하였고 평택지역 국채보상운동에서 주민들을 독려한 바 있었다. 이외에도 4월 1일 북면 은산리와 청북면 백봉리, 4월 3일 오성면 학현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인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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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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