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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낙랑고고학 = Nakrang Archeology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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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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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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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70(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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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자들의 주도로 강제병합이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실시되었던 각종 고적조사와 걸음을 같이하며 시작된 낙랑고고학은 중국관련 유물만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결과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을 고대 중국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든 측면이 인정된다. 관련하여 낙랑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유물소유욕을 크게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낙랑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도굴을 불러일으키는 수요를 강점기간 내내 만들어 냈다.
그런데 세키노타다시가 중심이 되어 1909년에 처음 실시한 낙랑 유적의 조사는 그 시작부터가 식민사관 창출을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평양에 낙랑고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16년에「古蹟調査委員會」가 발족되고「古蹟 및 遺物保存規則」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낙랑유적 조사의 전체적인 배경과 목적이 달라진다. 이때부터 식민사관을 기획하고 指南한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낙랑유적의 조사에 집중적으로 관여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와 세키노타다시가 이끌었던 고적조사위원회가 내세운 1차년도 기획조사의 대상이 다름 아닌 漢治郡관련 유적이었다.
조선역사의 저급성과 타율성을 논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인 식민지 낙랑군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주는 물적증거를 생산해 내는 방편이기도 했던 낙랑고고학은 강점기간 내내 국가권력으로부터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다. 반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위만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의 고고학적 실체는 서서히 사라져 간 것이다. 결국 일제강점기 낙랑고고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조선을 없애고 그 자리에 낙랑군을 가져다 놓은 점이라 할 수 있다.
만약 1916년도에 시작된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을 한국인이 주도했다면, 그 첫 번째 조사대상은 분명히 고조선의 고고학적 실체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We can admit that Nakrang archeology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ttracted excessive attention about artifacts related to China excavated in areas around the city of Pyeongyang there by establishing an atmosphere in which northwesternregion of Korean peninsula was regarded as acolony of ancient China. Moreover, Nakrang ruin sand excavated artifacts became so popular that people were luredintopossessing Nakrang relics. Consequently, this led to many Nakrang ruins having been despoiled.
The investigation of Nakrang ruins conducted for the first time in 1909 by a team led by Sekino Tadasi was not purposely aimed at creating historical view based on colonialism from the very beginning. This can be said for the reason that we can find no trace of efforts made by Sekino's investigation team to find out Nakrang relics more than anything else. This is what makes Sekino different from Kuroita Katsumi who concentrated his efforts on finding out archeological evidences that could prove existence of Japanese colonial organization at Imna(任那日本府).
But overall background and purpose of the investigation was changed with the establishment of [Historic Ruins Investigation Committee] and enforcement of [Rules for Preservation of Historic Ruins and Relics] in 1916. We can find out that Kuroita Katsumi who planned and led historic view based on colonialism intensively involved himself in the investigation for Nakrang relics from that time on. The subject of planned investigation Historic Ruins Investigation Committee came up with in the first year of the investigation program was something related to “Hanchigun(漢治郡)” or Nakrang relics.
We can admit without reservation that popularity for Nakrang archeology maintained throughout the whol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somehow caused Nakrang culture to be recognized as nothing but Chinese culture itself. On one hand, Nakrang archeology was a means to produce physical evidences visually proving the existence of Nakranggun(樂浪郡) which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grounds for the history of Joseon(朝鮮) Dynasty to be seen as low in class and dependent. This resulted in effectiveness of Nakrang archeology being recognized by the governmental power throughout the entire period of the colonial rule. On the other hand, archeological substance of ancient Joseon including Wiman Joseon(衛滿朝鮮) faded out slowly over time through such process. It is perceived that the biggest damage inflicted by Nakrang archeolog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was to get rid of the ancient Joseon and put Nakrang instead in its place.
We are confident that if it had been Koreans who led the 5 year investigation program for historic ruins that began in 1916, the first subject of investigation would have been archeological substance of ancient Joseon(朝鮮) which stood for a year against an attack mounted by an army of 50,000 soldiers sent by the Emperor of Han(漢)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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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 | 0.7 | 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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