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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유재기의 국가건설운동과 농촌운동 = Yu Jae Gee’s State-Building and Rural Movement after Korean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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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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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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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29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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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 Jae Gee, who was the representative rural activist, came up to Seoul after Korean liberation. In Seoul, he actively participated in state-building movement involving the parties of Christians. As the member of the KiDok-Sinminhoe, association of the Christian political powers and the Association of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he led the Anti-Trusteeship movement. The critical consciousness against the left allowed him to actively participate the political movement.
In this process, he recognized the rural movement as the calling by God. He established the Brothers for Revival Korea as the part of state-building movement. It was characterized that the larger party of Christian political powers participated with KiDok-Sinminhoe. Brothers for Revival Korea was not simply religious gathering, but was practical association that prayed the independence of Korea by the spirit of Christian. The rural movement of Yu Jae Gee was to seek to establish the self-reliant community based on the idea of Christian socialism. The ideas of rural reconstructive movement, as an extension of the ideas of rural movement in Japanese imperial, was based on the value of Christian converged the spirit of love and sacrifice. Its definite goal was evangelization of rural areas through rural self-reliance. Thus, the discourse of rural reconstruction was the Jesus village-building movement based on the experience and direction of rural movement under the Japanese imperial.
After the liberation, the rural movement of Yu Jae Gee was pushed ahead in three ways. First, it was to train a leader who initiatively would found the Jesus village and co-operative. The missionary school for peasants was established, which was planned in 1930’s but could not be progressed by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The missionary movement for peasant school was to take the lead in rural movement among the peasant by themselves through resolving the Korean rural problems by the power of young peasants. Second, through publishing the Press of Revival Korea, it developed actively the press movement for enlightenment of the peasants. It focused on the supporting financial affairs from overseas or promoting and spreading the vision of rural movement. Finally, his rural movement, as a specific movement was spread out the various aspects such as co-operativeㆍwomenㆍyoung peasantsㆍtechnologyㆍcooperative farming.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농촌운동가였던 유재기는 해방이후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로 도착한 그는 기독교세력이 참여하고 있던 국가건설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기독교 정치세력의 단체인 <기독신민회>와 <독립촉성국민회> 임원으로 참여하여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그가 정치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게 되었던 것은 좌익세력에 대해 비판적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농촌운동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으로 재인식하였다. 그는 국가건설운동의 일환으로 <흥국형제단>을 창단하였다. 이 단체는 <기독신민회>와 함께 기독교 정치세력이 대거 참여하였다는데 그 특징이 있었다. 흥국형제단은 단순한 종교 모임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민족운동의 실천적 단체였다. 유재기의 농촌운동은 기독교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자립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즉 농촌운동 재건이념은 일제강점기 농촌운동이념의 연장선상에서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수렴되는 기독교적 가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구체적 목표는 농촌자립을 통한 농촌의 복음화에 있었다. 따라서 농촌 재건론은 일제 강점기 농촌운동의 경험과 방안을 토대로 구상한 예수촌 건설운동이었다.
해방후 유재기의 농촌운동은 크게 세 방면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예수촌 건설과 협동조합을 주도적으로 건설할 농촌운동 지도자의 양성이었다. 1930년대 계획했으나 정치적ㆍ경제적 어려움으로 진행되지 못했던 농민복음학교를 설립하였다. 농민복음학교운동은 한국 농촌문제를 농촌청년들 힘으로 해결함으로써 농민 스스로 농촌운동을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興國時報」의 창간을 통해 농촌계몽을 위한 활발한 언론활동을 펼쳤다. 언론활동을 통해 해외의 재정후원을 받거나 농촌운동의 이상을 홍보, 확산시킨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끝으로 유재기의 농촌운동은 구체적인 운동으로 협동조합ㆍ부인ㆍ농촌소년ㆍ기술ㆍ공동경작 등의 방면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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