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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속학俗學’론의 추이推移와 다산 = “Secular Learning” 俗學 and Tasan Cheong Yagyong’s Theory of Knowledg
저자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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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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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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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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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8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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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조의 ‘속학俗學’에 관한 책문의 제출배경과 다산의 ‘속학’ 해석이 지닌 시대적 의미를 확인하고자 한다. 신해년1791 정조는 ‘속학’에 관한 책문을 출제하여 당시 학풍의 쇄신책을 요구한다. 당시 정조는 학자들이 패관소품稗官小品의 문체에 경도되어 사상의 순정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강력한 문체반정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정조가 ‘속학’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려한 직접적 원인은 서학과 패관소품을 포함한 명청대의 학문이었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국가경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의리론이나 사공론事功論을 둘러싼 이념적 갈등이었다. 그 스스로 주자학을 이념으로 한 정학론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현실의 복잡한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공리성功利性과 권도權道의 채택도 불가피하였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 의義•이利 왕도王道•패도覇道는 선명하게 구별되지 않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리성을 일정량 인정하는 대신 오히려 왕도정치를 강화하는 것이 국가경영에 도움을 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욕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제하는 방법은 주자 성리학을 강화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믿었다. 이에 그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을 찾았다. 정조는 주자와 사상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진량의 패도론을 부정하지만 ‘사공事功’의 필요성은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학문學問과 사공은 두 가지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성호 이익 백호 윤휴와 같은 선각적인 지식인들의 진량陳亮과 사공학에 새로운 해석에서 비롯되었다정조는 명말청초의 학문이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조선의 학문을 속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 하나는 경의학經義學의 본령을 왜곡한 양명학이었다. 다음으로 박물고증학 즉 ‘엄박淹博의 학’이었다. 마지막으로 명청대의 문장학이었다. 정조의 ‘속학’ 개념은 ‘정학’으로서의 주자학에 반하는 개념이었고 그 비판기준은 중국 중심적이었고 정치적 해석행위였다반면 다산은 ‘속학’을 ‘아학雅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설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자 하였다. 그의 속학론은 종래의 정학正學속학의 대립적인 개념이 아닌 아학속학의 상호보조적인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다산이 ‘아악雅樂’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속악俗樂’을 긍정한 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중국 중심의 문명의식과 학문관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가 “중국과 오랑캐는 그 도와 정치에 달려 있는 것일 뿐 강역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속학’에 대한 긍정을 보여 준다. 그는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있다. 이 새로운 문화의식이 자연스럽게 ‘아학’과 함께 조선학으로서의 ‘속학’을 공부할 필요성으로 전환되었다.
다산의 ‘속학론’은 이 시기에 들어 진행되던 일종의 ‘지식의 세속화’ 현상이 다산의 철학 속에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학문경향은 도학적이고 윤리적인 틀을 벗고 민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승인하고 일상의 삶과 생활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정조에 의해 속학으로 규정된 공안파와 경릉파와 같은 학문 사조가 폭넓은 호응을 얻던 시기였다. 다산은 이 입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자학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반 민중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 본격적인 ‘조선학’ ...
This paper attempts to clarify the background on the order King Jeongjo r 17761800 gave in 1791 to civil officials to reply to his ques¬tion on how to root out and rectify “secular learning,” which had become popular among some Confucian literati. “Secular learning” was intro¬duced during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dynasties of China, and it gained many followers in Korea. King Jeongjo’s order was precipitated by a national crisis caused by the growth of Catholicism and anti-Confu¬cian values among a small group of people. His order was made just after the execution of two Christians who had burnt their ancestors’ memorial tablets. On the surface, his intent seems to be to implement a sweeping reform with respect to the distribution of secular writings by a group of Confucians in order to reestablish “Zhu Xi’s Neo-Confucianism” 朱子學. The king identified the contemporary trend in writing as “secular learning” and blamed it for contaminating the country with selfishness and the pursuit of individual desires, regardless of social class. His dec¬laration was intended to bring an end to the endless ideological debates between the two opposing parties in his government with the reestab¬lishment of Zhu Xi’s Neo-Confucianism.
At the same time, the king was well aware that the focus of Zhu Xi’s philosophy was on cultivating pure mind and pursuing the principle of the universe and that it was not enough to maintain the absolute authority of his kingship. His ruling principle also came from the contemporary “practical learning” precepts of Confucian scholars Yi Ik and Yun Hyu, but he included his own interpretation and developed his own thoughts on the perspective of kingship. The schools which King Jeongjo blamed for the deviation from “right learning” 正學 were a group of followers of the Yangming School 陽明學, encyclopedic study 淹博, and textual reading during the Ming and Qing dynasties. The king’s definition of “secular learning” was the opposite of Zhu Xi’s Neo-Confucianism simi¬lar to the orthodox Chinese tradition of learning.
Tasan, once close to the absolute power of the monarchy and recog¬nized by others as the best scholar to give lectures o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to the king, had a different view of “secular learning.” Com¬pared with King Jeongjo, Tasan accepted “secular learning” as another way of pursuing the truth in the world. He did not appear to agree with the alternative scheme of “right learning.” This attitude enabled him to develop a new perspective outside of Zhu Xi’s philosophy. During the 18th century, there was a new cultural atmosphere in which some Con¬fucian scholars incorporated human desire and daily life into their “way of learning.” Unlike “secular learning” as an object to be removed as King Jeongjo demanded, Tasan’s “secular learning” offered another way to appreciate and support everyday life in the country. In addition, his philosophy was different from the Chinese narrative literature schools such as Gōngān School 公安派 and Jìngling School 竟陵派, which influenced the writing style of Korean literati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asan, with an approach that differed from that of Zhu Xi, tried to overcome this and to provide a new philosophy that focused more on appreciation of practical methods. Tasan’s poem titled “Threshing Bar¬ley” 打麥行 is a good example of his philosophy on “secular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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