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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제주 石築 文化의 始原과 傳承 = The Origin and Inheritance of Stone-Architectural Culture in Tamla and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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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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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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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146(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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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masonry culture in Jeju demonstrated through the fortress and the abode for local government officials as typical examples had began with the stone-made structure on Keumsung-Ri that was built in the early period of Tamla and is now only remains. This stone culture had been accumulated and inherited. Housing type in the late 7th century in Jeju was the architectural form on the ground with stonewall and thatched-roof. It could be inferred that this residence type did not appear all of sudden, and thus had been made in the earlier time. In sum, the site of Keumsung-Ri can be thought of an original form of housing type with stonewall, which shows that there had already been stone-masonry culture in the period of Kingdom of Tamla.
Known from the example of Keumsung-Ri site built in the early period of Tamla (three Kingdoms period), constructing the stonewalls around dry field (farm) by judge Kim Koo was based on the stone-masonry culture which had been utilized from the early period of Tamla. Stonewall, which was a stone-made structure marking boundary, had a function of protecting the residential area or village. In this context, constructing stonewall around fields have a historical significance of spreading stone culture and making it rooted in everyday life The long wall surrounding seashore(Hwanhaejangsung) had been the structure of military defense till the late period of Chosun. The long wall built by Korye army in order to obstruct Sambyulcho(Korye’s special forces, and rebels at that time)’ invasion, had been militarily utilized as a supplementary facility with the site for beacon fire. However, it is disputable to think of the long wall surrounding seashore as a beginning of architectural culture without recognizing its origin from the time of the Kingdom of Tamla. Nevertheless, unfortunately the interpretation that stone culture or stone-masonry culture in Jeju had been transferred from outside and then diffused has been widely spread.
It is mistaken to investigate the long wall without recognizing the difference between the constructing style in Korye and it, and the specific stone-masonry culture shared by Jeju people who were mobilized in constructing the long wall. It was almost impossible for Korye army or Sambyulcho alone to build the long wall. All of Seong-seok(城石), Stones used for walls(面石), the stone that fills the inside of the wall(채움석), in the long wall were made out of Jeju basalt, and then it meant that the long wall was built with stones nearby rather than the materials taken from other places. Basalt being porous was very different from stones from Korean Peninsular. Therefore, the Korye army and Sambyuncho, in the process of building the long wall, had to mobilized Jeju people who already had their own architectural culture based on basalt since the early period of Tamla.
제주의 대표적 석축문화로 볼 수 있는 성곽과 관방에 대한 석축 사례는 이미 탐라전기에 축조되어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성리 석축유적부터 축적되어 온 돌문화의 전승에서 비롯하였다. 7세기 후반 탐라의 주거 형태는 지상식 주거지로 주거지 경계에 돌담을 두르고 풀로 지붕을 엮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거 형태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 이전부터 이용되었을 것이다. 즉, 금성리 유적은 원형의 돌담집 자리로 여겨지며, 제주도에는 탐라국 시기에 이미 돌을 이용한 석축 문화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판관 김구의 밭담 수축은 탐라전기(삼국시대)에 수축된 것으로 보이는 금성리 유적의 수축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 시기인 탐라 전기부터 활용되어 온 석축 문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주거지 보호나 마을 보호 등의 경계 석축의 원용을 통해서 생활문화의 저변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역사문화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울러 환해장성이 제주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 후기까지 활용되었던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특히 삼별초의 제주 진입을 막기 위해 고려 관군에 의해 축조된 환해장성이 조선시대에서는 연대와 봉수 등의 군사적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환해장성의 축조가 제주 축성문화의 시원처럼 묘사되고 있어서 탐라국 시기의 축성문화는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로 인하여 제주의 돌 문화 또는 석축 문화는 외부의 문화전파로 형성되었다는 시각의 확산을 가져왔다.
그러나 환해장성의 축조는 기존의 고려시대 축성과는 차이가 있고, 축성에 동원된 제주민들도 고유의 석축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한 채 환해장성을 연구하고 있는 현상이 보인다. 환해장성의 축조는 고려군과 삼별초군만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환해장성의 성석이나 면석, 채움석 모두 제주도산 현무암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장소에서 석재를 가져와 성을 축조한 것이 아닌 환해장성이 설치된 주변 해안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다. 제주도의 다공질 현무암은 한반도 내의 석재와 그 성질이 달라 성곽을 축조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려군과 삼별초군이 환해장성을 축조하는 과정에는 탐라전기부터 현무암을 활용하는 석축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제주민들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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