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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庵 李玄逸의 理學과 현실인식 = Lee Hyun-il's Neo-Confucianism and Reality Cognition - Focused on the Relation and Comparison the Those of Bangye Ryu Hye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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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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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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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4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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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임진왜란ㆍ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의 ‘재조再造’의 요구가 점증하고 있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주자학에 근거하여 조선사회의 개혁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이현일은 17세기 영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숙종조 남인정권의 성립을 맞아 산림으로 출사하였다. 이현일은 갑술환국으로 인하여 숙종조 1차 남인정권이 성립하자 유일遺逸로 출사하였으나 당시 남인정권의 산림으로 ‘경남京南’인 허목ㆍ윤휴 등이 있었기 때문에 산림으로서의 활동은 미미했다. 이현일이 산림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 것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2차 남인정권이 성립하면서부터였다. 이현일은 숙종 15년 산림으로 출사하면서 이현일은 높은 학문을 바탕으로 경연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숙종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고, 이현일은 경신환국에서 피화된 남인인사들의 신원을 달성하고, 후에 영조가 되는 왕자의 탄생에 즈음하여 세자와 왕자의 구분을 주장하는 적서구분의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집권남인들이 발설할 수 없는 부분을 유현儒賢으로서 관철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현일의 산림으로서의 활동은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인하여 노론이 집권하게 되자 가혹한 보복을 당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현일이 집요한 노론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은 정치적 반대론자로서 노론을 공척攻斥했다는 점은 물론 있었지만, 이현일의 남인산림으로서의 이론적 활동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현일은 숙종조의 조선사회를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해져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그 원인으로 ‘사설邪說’이 횡횡하여 공도公道가 무너지고 왕법이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설’의 핵심이 되는 율곡의 이기론理氣論과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에 대하여 격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이는 후에 이현일의 신원을 노론계에서 극력 반대하면서 강상죄인으로 취급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현일은 1차 남인정권의 성립기 때 유형원의 벗이자 사돈이었던 배상유로부터 『반계수록』의 서문과 아울러 『반계수록』의 개혁안을 실행할 것을 권고 받았다. 사실 이현일은 젊은 시절부터 국가의 ‘경장更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실행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형仲兄 이휘일과 더불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는 등 이론적 모색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접하고 “이고李?의 『평부平賦』나 임훈林勳의 『본정本政』과 같은 책이라도 이보다 낫지 않을 것이며, 그 대체의 규모로 말하더라도 두씨杜氏의 『통전通典』이나 구씨丘氏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 비해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이휘일의 사망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홍범연의』의 편찬을 속행하여 숙종 12년 완성하였던 것도 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현일은 기사환국 이후 이현일은 산림山林으로 다시 출사하여 화폐유통貨幣流通 및 선사법選士法 등 시정時政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이는 유형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The opinions insisting the reformation of Joseon Dynasty had increased in the 17th century after Imjinyoaeran(壬辰倭亂) and Byeongjahoran(丙子胡亂). Confucianists in those days sought the strategies of reformation on the base of neo-confucianism. Lee Hyunil was a leading Neo-confucian scholar of the Yeungnam academy(嶺南學派) who was appointed to Sanrim(山林) as Namin Party(南人) came into political power under King Sookjong rule. Lee was raised to Yuil(遺逸) due to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Namin regime under King Sookjong rule. However, Lee's roles as a Sanlim were not active because Heo Mok(許穆) and Yun Hu(尹?) of Kyeong-Nam(京南) were responsible for another Samlim of Namin regime in those days.
The status as a Sanlim of Lee Hyunil was strengthened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the second Namin regime right after Gisahwanguk(己巳換局). Lee Hyun-il gained the prestige of King Sookjong for his outstanding academic competence in literacy contests after rising to Sanlim in the 15th year of King Sookjong rule. Lee also exonerated Namin Party from a false charge during Gyeongsinhwanguk(庚申換局). Lee raised the dispute about Jeogseoguboon(嫡庶區分) contenting the distinction between a crown prince and princes at the time of birth of a prince who was crowned King Youngjo. Unfortunately Lee's activities as Sanlim were severely retaliated as Noron Party came into rower through Gabsulhwanguk(甲戌換局) in the 20th year of King Sookjong rule.
Noron(老論) attacked Lee Hyunil for his academic activities as a Namin Sanlim and his political antagonism against Noron as well. Lee concluded Joseon Dynasty under King Sookjong rule at a critical national fate which was caused by the downfall of king's power as the absolute being and the disorder of national justice in relation to the proliferation of heterodoxy opinions in those days. He criticized that the core of heterodoxy opinions was Yulkog's Igiron(理氣論) and Insimdosimron(人心道心論). Due to Lee's influences on such circumstances in those days, Noron Party resisted severely Lee's exoneration and made him a moral offender.
Bae Sangyu(裵尙愈), Yu Hyungwon(柳馨遠)'s friend and relative by marriage, recommended Lee to write the prefaces and new edition of 'Bangyeosurok(磻溪隧錄)' during the first Namin regime. In fact, Lee had been interested in the reform of the society and tried to seek theoretical foundation of action collaborating with Lee Hwil(李徽逸), his brother, for writing of 'Hongbumyeonwi(洪範演義)'. Lee praised that Yu Hyungwon's 'Bangyeosurok' was "better than Lee ao(李?)'s 'Pyeonbu(平賦)' or Lin xun(林勳)'s 'Bonjong(本政)' and was as much as Tu U(杜佑)'s 'Tongjeon(通典)' or Gu(丘)'s 'Daehagyeonwi(大學演義)'." 'Hongbumyeonwi(洪範演義)' that had been stopped by Lee Hwil(李徽逸)'s death was established by such influences at the 12the year of King Sookjong rule, As rising back to Sanlim after Gisahwangok, Lee Hyunil proposed actively administrative policies such as currency reform and official appointment, which might be influenced by Yu Hy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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