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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의 고마신사[高麗神社] -근대에 이용된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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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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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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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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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28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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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고마신사[高麗神社]가 있다. 668년에 고구려가멸망하자 일본에 많은 고구려인이 도래했다. 716년에 일본 조정은 관동지방에있던 고구려인을 현재의 사이타마현 서부에 이주시키고 고마군을 세웠다. 그 리더는 若光이고 그가 죽은 후에 그를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 고마신사의 기원이다. 약광의 후손은 성을 고마[高麗]로 하고 대대로 신사의 宮司를 맡고 지금까지계속된다. 작년 2016년은 고마군 건군 1300주년으로서 기념행사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고마신사는 일제 강점기에는 ‘內鮮一體’ 정책 추진에 이용되었다. 즉 고대 신사의 역사가 조선인이 일본에 동화했다는 살아 있는 모델로 근대에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근대기의 고마신사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 찾았는데 자세한 연구는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그 결과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 6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1886년 高麗氏系圖의 조사를 계기로 고마신사의 중요성이 역사학계에 인식되었다. 1900년에는 일본에 망명했던 조중응이 신사를 방문해 지금도 남아 있는 신사의 편액을 썼다. 2) 1920년대부터는 내지시찰단의 방문이 잇따랐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지식층 사람들에게 일본 각지를 견학시켜 일본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는 행사였는데 고마신사도 시찰지의 하나였다. 3) 1934년에는고마신사를 지원하는 민간후원단체 고마신사봉찬회[高麗神社奉賛會]가 설립되고 기부금 2만 5천엔으로 신사의 중수·확장이 이루어졌다. 또 총독부는 조선사상범을 ‘개선’시키기 위해 일본각지의 신사를 참배시켰는데 고마신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4) 1940년 서울 남산에 있던 朝鮮神宮과 고마신사 사이에서 나무교환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내선일체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볼 수 있다. 5) 1942 년에는 이은 일가가 참배했다. 이 해에 신사의 경내정비가 끝났다. 6) 1943년 이후에는 일본의 전승기원 등이 행해졌다.
더보기Koma Jinja(高麗神社) is a shrine in Hidaka city(Saitama prefecture, Japan). When the Goguryeo(高句麗, one of the three empires on the Korean Peninsula in ancient times) fell in 668, many of its people came to Japan. In 716 the imperial court moved Goguryeo people living in the Kanto region to what is today the western part of Saitama prefecture. Their leader was JakKo(若光), and after his death Koma Jinja was created for his worship. JakKo’s descendants took the name Koma and have served as the shrine’ s chief priests for generations, up through today. Last year(2016) marked 1300 years since the Koma district’s creation, and many commemorative events were held. After Japan colonized the Korean Peninsula, Koma Jinja was used to advance naisen ittai 內鮮一體(“Japan and Korea as one”) policies. In other words, the history of an ancient shrine was used in modern times as a model of Korean assimilation into Japan. I wanted to know the history of Koma Jinja during this time, but could not find any detailed research on it. I therefore decided to survey newspaper and magazine articles, and found that the shrine’s modern history can be generally divided into six periods. (1) The academic field of history became aware of the shrine’s importance due to an 1886 survey of the “Koma-shi keizu(高麗氏系圖)”, or Koma family tree. In 1900 Cho Jung-Eung, who was in exile in Japan, visited the shrine, and wrote the shrine’s hengaku(扁額, a tablet hanging over a shrine’s entrance that bears its name). (2) In 1920 Naichi Shisetsudan(內 地視察団, Mainland Japan Inspection Groups) visited the shrine one after another. This was done as part of a policy in which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tried to deepen Korean intellectuals’ understanding of Japan by bringing them to various places throughout the country. (3) In 1934, Koma Jinja Hōsankai(高麗神社奉賛會, a private group providing support to the shrine, was founded, and 25,000 in donations) was used for repairs and expansion.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also had Koreans who had committed crimes of conscience visit various shrines throughout Japan to “reform” them. One of these shrines was Koma Jinja. (4) In 1940 trees were exchanged between the Josean Singung/Chōsen Jingū, a shrine on Namsan in Seoul, and Koma Jinja. This can be seen as a naisen ittai religious ritual. (5) In 1942 Yi Un and his family visited the shrine. This year the shrine’s repairs and expansion were completed. (6) From 1943 onwards, prayers were held for Japan’s war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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