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1919년 군산 금강사 범종 조성
저자
김두헌 (전북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1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370.1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95-127(33쪽)
KCI 피인용횟수
1
제공처
군산 금강사 범종 조성일은 삼일운동 발생 5개월여 만인 그해 8월 10일이었다. 군 산의 삼일운동은 호남 최초의 만세 운동이었다. 삼일운동 당시 군산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강한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불안해하며 만일 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범종 조성일 이전의 시기에 군산의 삼일운동 피검자들 에 대한 재판은 대부분 완료되었다. 따라서 당시 군산 지역 한국인 사회는 좌절의 분 위기였고, 일본인 사회는 안도 속에 일제의 평화와 번영을 염원하고 있었다. 금강사 범종 조성은 이렇듯 극명하게 대립된 군산 지역 일본인 사회와 한국인 사회의 분위 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범종 조성 목적은 군산 지역 일본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것을 자축하며, 일본 천황의 통치가 영원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가 견고해지기를 염원하기 위해서였다. 금강사 범종 형태는 일본 범종 형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범종의 용뉴는 쌍룡 형태, 몸통은 직사격형으 로 가로 세 부분, 세로 네 부분으로 각각 나누어져 있다. 가로 윗부분에 종유가 표현 되어 있고, 중간 부분에 명문이 음각되었다. 명문에는 범종 조성 목적, 발기인 7명을 포함한 140명의 시주자의 시주액과 성명, 범종 주조자의 거주지와 성명 등이 음각되 어 있다. 범종 주조자 다카하시 사이지로는 어렸을 때 가난하여 고향 경도에서 불구 점 사원으로 있다가, 20세 때 불구점을 개업하고 근검절약하며 사업을 확장시켜 나 가, 마침내 48세 때에 주조 공장을 설립하였고, 70세 때에는 경도의 다액 납세자가 되었다. 그가, 그리고 그의 사후 그가 남긴 상점에서 만든 범종들이 일본에서 5개, 한 국에서 3개가 각각 현전한다. 이들 범종 형태 역시 일본 범종 형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금강사 범종 조성 발기인 7명은 농장 지주, 미곡상, 무역업자 등 군산에서 쌀을 일본으로 이출하는 관련 사업 종사자들이었다. 시주자 140명 중에는 금강사 신 도뿐만 아니라, 군산 지역 내 다른 사찰 신도, 비불교 신도 등이 상당수 있었고, 1928년 군산의 인물 46명 중에 2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 었다. 이는 금강사 범종 조성 행사가 금강사만이 아닌 군산 지역 일본인들의 불교 행 사였다는 것을, 그러나 한국인은 제외시켰다는 것을, 당시 금강사가 일본인들에 의 해서만 운영되었다는 것을, 군산의 일본인들은 불교계에서조차 서로 연대하고 협력 하였지만 한국인들은 차별하였다는 것을 각각 시사한다.
더보기The GunSan GumGangSa’s Bell was built in August of that year, five month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Immediately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of GunSan, the first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Jeolla-do(全羅道), the Korean society in GunSan was overwhelmed by the atmosphere of rage and frustration, the Japanese society was praying for the peace and prosperity about them and Japanese imperialism, as they were relieved to build the bell. The construction of the bell took place in the atmosphere of between the Japanese society and the Korean society in GunSan, where there was a sharp conflict. The purpose of the construction of the bell was to congratulate the Japanese in GunSan at the time that World War I had ended and reached the era of peace. It was also to wish that the Japanese emperor's rule would be permanent, Japanese imperialism would be strengthened, and Japan's colonial rule over Joseon(朝鮮) would be stronger. The bell has the same characteristics as the Japanese temple’s bell in its shape and form. The bell’s YongNue(龍鈕) is a twin dragon shape, and the whole body is composed of right angles, and it is divided into three parts horizontally and four parts vertically. The upper part of the bell’s torso is expressed with ChongYou(鐘乳), and the milddle part is inscribed with the inscription. The inscription is carved on the bell’s building purpose and the names and contribution amount of the 140 donors including 7 promoters, and the residence and name of the founder in the three sides. The bell’s founder, DaKaHaSiSeiJiRo(高橋才治郞) was very poor when he was a child, and he worked at a Buddhist tools shop(佛具店) run by another person in his hometown of Kyoto(京都), he opened his own Buddhist tools shop, after leading a diligent and saving life and expanded his business. He finally founded a casting factory at the age of 48, and succeeded as one of the largest taxpayers in Kyoto city at the age of 70. The bells he and his company after his death had made now remain five in Japan and three in Korea. Of the previous eight, he made six in his lifetime. The promoters were landowners, rice dealers, and traders related in moving rice from GunSan to Japan. Among the 140 donors, there were those who were not GunSan Geumgangsa’s Buddhists, other temples’s Buddhists in the Gunsan area, and 26 out of 46 famous figures in GunSan in 1928. The event to build the bell was not only the GunSan GumGangSa but also many Buddhist’s event in GunSan. However, none of the donors were Koreans. As a result, it can be seen that the event of the construction of the bell was conducted only by Japanese in Gunsan, and even in the Gunsan Buddhist community, Japanese solidified or cooperated with each other, but Koreans discrimin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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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 평가 | 등재후보 탈락 (계속평가) | |
2015-10-22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역사와교육학회 역사와교육 -> 역사와교육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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