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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河回 ‘屛儒’의 家學과 斥邪 활동 = On the Thoughts and Activities of Poongsan Ryu Families (Byeongyu, 屛儒) in the Late 19th Century
저자
김도형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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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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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58(58쪽)
KCI 피인용횟수
1
제공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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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te Chosun period, Poongsan Ryu were one of the most prestigious families of Yeongnam province. As the descendants of Ryu Woon-ryong(柳雲龍, 1539~1601) and Ryu Sung-ryong(柳成龍, 1542~1607), their academic genealogy was formed by passing down family scholarship based on Toegye(李滉, 1501~ 1570)’s scholastic mantle. In spite of Noron(Old Doctrine)’s political hindrance, a sizable number of Poongsan Ryu family served as government officials. Having Yeonguijeong(Chief State Councillor) Ryu Sung-ryong as an ancestor, Poongsan Ryu were proud to be hereditary royal subjects; and this influenced on their family scholarship, governance theory and political decision. Poongsan Ryu developed scholarship that morally and practically carries out Toegye’s teachings, and also focused on assisting King to study Sage Learning and to become a Sage king.
In the late 19th century, Taewongun appointed Ryu Hoojo, a member of Namin(Southerners), as Jwauijeong(Second State councillor) in consequence of the policy of balancing the power of Andong Kim and Pungyang Cho clans. This led Yeongnam Namin, including Poongsan Ryu to politically support Taewongun’s policies. Whereas, Yeongnam Namin were divided into two different schools; Seoae school(Poongsan Ryu, or Byeongyu) and Hakbong school(Hoyu). Poongsan Ryu and Hoyu disagreed upon certain issues according to their academic affiliation. While Poongsan Ryu tepidly opposed to the removal of sowon, they eagerly participated in making petition to bring back Taewongun. Moreover Poongsan Ryu did not completely reject the government policy of modernization even while they maintained the position of ‘Reject Heterodoxy’ (chuksa). Also, they were not very enthusiastic about participating in petitions against 『Chosun Chaengnyak』 or the Righteous army’s movements. Nor did they convert to the Enlightment movement, while some of Namin did. The main factors that influenced their political behavior were the family scholarship which regarded individual’s moral practice very highly, and their consciousness as the hereditary royal subjects; because of these factors, Poongsan Ryu could not help but be cautious about expressing ideas or taking collective action against the government.
조선 후기, 풍산 류씨는 영남을 대표하는 문중이었다. 이들은 謙庵 柳雲龍과 西 厓 柳成龍의 후예들로 퇴계학통 안에서 家學을 전수하면서 학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노론의 영남 남인에 대한 견제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정부의 관료로 진출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世臣’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가학이나 경세론, 처신론에서 큰 지침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체계화된 퇴계학문을 도덕적,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학문에 더 힘을 기울였으며, ‘世臣’의 자손으로서 임금의 聖學, 聖化를 보필하는 일을 중시하였다.
19세기 후반, 대원군의 남인 등용 정책에 따라 柳厚祚가 좌의정에 올랐다. 이 후 ‘屛儒’를 위시한 영남 남인들은 주로 대원군과 그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영남 남인 사이에는 ‘병호시비’에 따라 그 처신 여하에 차이가 있었다. 서원 철폐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로 반대하면서도 병유들은 다소 소극적이었고, 그 반대로 대원군 실권 후에 전개된 봉환 상소에는 적극적이었다. 또한 서양과 일본의 침략 앞에서 왕조를 지키려는 척사론은 견지하고 있었지만, 병유들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을 전면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으며, 또한 『조선책략』을 반대하는 상소운동이나 의병항쟁에서 다소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虎儒 일각에서 일어난 계몽운동으로의 노선 전환 같은 극적인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든 ‘처신’에 영향을 미친 것이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던 가학과 ‘세신의 후손’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정부를 상대로 의견 표명이나 집단 행동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17-01-23 | 통합 |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2-28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퇴계학과 한국문화 -> 퇴계학과 유교문화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8-23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퇴계학과 학국문화 -> 퇴계학과 한국문화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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