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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리(韓星履)의 <관성자전(管城子傳)> 고(攷) = A Study on the <Kwanseongjajeon> Written by Han Seong-ri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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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810.5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5-28(24쪽)
제공처
소장기관
<관성자전>의 작가인 한성리는 신게(莘憩) 이돈우(李敦宇)의 제자로, 고향 음성(陰城)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최영승과 함께 자기 고향의 문화공간이었던 서원(書院)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일면, 오윤겸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구령(李龜齡, 1482∼1542)의 충절을 포증(褒贈)하는 일을 도와 음성에 이구령의 충신문(忠臣門)을 건립하는 일에도 일조하였다. 또한 함의정(咸宜亭) 같은 사숙(私塾)을 지어 성리학의 강습 장소로 삼았는가 하면, 음성군 향교의 직원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시에서 ``바람의 별이 북두(北斗) 삼성(參星) 비춰 중심 빛내듯 한 아름 가슴 속 충정으로 중심별을 호위하듯`` 하겠다던 단심으로 향리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앞장서 분발한 인물이다. 문중을 위해서는 11대 선조인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의 문집 『송재선생문집(松齋先生文集)』을 간행하는 일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만 일제의 강압적인 행정 조치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세로 맞서 대립하였다. 그러한 현실 문제에 능동적이었던 한성리의 문학 세계 또한 그의 삶의 양상과 잘 들어맞는다. 조선 후기 이후에 상당수의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처럼, 그의 경우도 시보다 산문 쪽이 우세하다. 산문의 내용 역시 역사적 문제와 현실 시사 문제에 각별히 유의하면서 시대의 올바름을 가리는 논단이 주류가 되었다. 이렇듯 한성리는 자신의 판단에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대충 넘어가는 무난한 성격이 못되었다. 늘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 부당함을 적발하고 비판하는 직선적 인물이었다. 각별히 문방사우 중에서 붓을 선택하여 열전 양식을 꾸려 간 데도 필연성이 따로 존재해 보인다. 그것은 대개 그의 엄정한 필법(筆法)을 지향하는 직선적 삶의 태도와 유관할 것으로 인지된다. 곧 그의 비판 대립적인 기질과, 그것을 곧잘 문필로 나타내곤 하던 기질이 문필의 대명사 격인 붓을 의인 대상으로 삼은 <관성자전>을 만들어낸 계기는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것이다. 그 단서로 의인 전기 안에 ``바깥으로 나타내 보이기를 좋아해서 어느 때는 남의 잘못을 드러내기도 하고 세상의 이지러짐을 비꼬기도 하여 당시대 임금들의 미움마저 샀다``거나, ``자기 스스로를 위해 얻은 바는 없었다. 게다가 진실로 남이 아쉬워서 구하는 바가 있으면 이마가 닳고 발꿈치가 해짐을 가리지 않고 응하였다가 외려 다른 부류의 비웃음마저 샀으니`` 하는 식의 관성자를 묘사하는 부분들은 흡사 그의 인간적 성품과 기질 단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오버랩 현상을 감지케 하는 국면이 있다. 그리하여 <관성자전> 역시 조선 중기 광해조에 권필의 <곽삭전>이나 조선 후기 김석행의 <진현전> 같은 가전에서 볼 수 있는 자기 가탁적인 요소가 담긴 작품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더보기Han Seong-ri(韓星履), the author of <Kwanseongjajeon> and a disciple of Singe(莘憩) Lee Don-woo(李敦宇), made a great effort toward recovering the honor of the lecture halls that served as the cultural place in his hometown in Eumseong county. He also helped building Gate of Loyal Retainer to pay tribute to Lee Gu-ryeong, who died during Limjinwaeran, ran a private school called Hamuijeong as a venue of Neo-Confucianism, and volunteered as a staff member at the hyanggyo (the Confucian temple and school to teach local students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in Eumseong county. As he sang in his poem, ``As the star of wind shines on North Differ and Three-Stars to light them up, as one escorts the central star with the allegiance in one`s heart``, he devoted himself to the development of his hometown. For his own people, he had Songjaeseonsaeng-munjip, a collection of Songjae Han Chung, his 11th ancestor published. However, he confronted and fought hard against the administrative coercion of Japan. His literary works bear a similarity to aspects of his life in that his active attitude toward real issues is reflected. As is the case in the works of most authors in (the) post-late Chosun period, his prose works are superior to his poetry in terms of the quality. The contents of his prose dealt particularly with historical and contemporary issues, and the topics included the suggestion of what is right or wrong according to values of the age. This way, Han Seong-ri(韓星履), refused to compromise about anything he judged to be not right, confronting unfairness all the time. It seems there is the necessity as to why he chose the brush out of the four precious items of the study and created a series of biographies. It is considered to be relevant to his uprightness which is presented in his preference of strict technique of calligraphy in general. That is to say, his critical temper and his tendency of presenting it are assumed to be the factors that led him to personify the brush, which is representative of the literacy art, and finally to create Kwanseongjajeon being mentioned. By way of example, some parts in the series of biographies describe Kwanseongjaris a man who ``liked things explicitly; sometimes revealing others` flaws, sometimes giving a sarcastic twist to mundane absurdity, thus making the kings of the time dislike him``, and that ``There was nothing gained for his own sake. There was nothing not to be done when asked by others to help them on the contrary although it brought him into derision``, enable us to relate his personal and objectival characteristics into the work. Therefore, as with Kwaksakjeon by Kwon Pil in the mid-Chosun period and Jinheonjeon by Kim Seok-haeng in late Chosun period, Kwanseongjajeon is inferred to be one of the works where the author`s biographic elements are ob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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