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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한글신문의 구조적 변화와 기자들의 동향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 A Structural Change of ‘Korean Language Newspaper’ and a Movement of Journalists After 1930s -Focused on 『DongA Ilbo』 and 『Chosun Ilbo』-
저자
성주현 (독립기념관)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53-204(52쪽)
KCI 피인용횟수
9
제공처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언론을 식민통치를 위한 선전수단으로 삼기 위해 총독부 기관지로 『매일신보』만 남겨두고 모든 언론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3ㆍ1운동 이후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제한된 표현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민족감정을 파악하는데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그 결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이후 1940년 8월 동시에 폐간될 때까지 나름대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3ㆍ1운동 이후 일제의 언론정책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대륙침략정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3ㆍ1운동 이후 신문발행을 허가한 이후 1936년 이전까지는 치안유지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언론통제를 강화하면서 국가총동원법과 군기보호법 등을 통해 동원체제에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지배체제 협력의 테두리에 편입되었고, 결국 친일의 대열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는 1931년 6월 18일 만주를 침략하면서 언론정책도 1920년대보다 강화되고 전시언론 통제체제로 구축되었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신문을 포함한 언론은 비상시국 즉 전시체제에 필요한 홍보 내지 선전도구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민족지를 대변해왔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식민정책을 비판하기보다는 이를 홍보 선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논조에서 차이가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조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언론통제안’을 계획하고 이를 실제 적용함에 따라 양 신문은 폐간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양 신문의 폐간에 대해 ‘자진’ 또는 ‘강제’이라는 이분법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하였으나 분명한 것은 양신문의 폐간은 일제의 언론통제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폐간 이후 임원을 포함한 주요 언론인의 경우 지배체제에 적지 않게 협력하였다.
그밖에 양 신문의 폐간 이후 적지 않은 기자들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직하였다. 다만 이들의 전직이 나름대로 생활고라는 사정이 없지 않겠지만 아쉬운 부분이 남기고 있다.
Japan ceased to publish all newspapers except only 『Maeil Shinbo』 as a journ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to use the newspaper as the method of making a pitch for a colonial rule after colonizing Korea. However, after 3.1 independence movement, Japan partially allowed freedom of speech limited as part of appeasement policy. There was no intention to use it for identifying feelings of the nation. As the result, 『DongA Ilbo』 and 『Chosun Ilbo』 were launched and they executed its role as mass media until they were discontinued in August 1940.
After 3ㆍ1 independence movement, the press policy of Japan was generally similar to the expansive continental policy. After 3ㆍ1 independence movement, Japan permitted the publication of newspaper and then controlled the press under the Maintenance of the Public Order Act until 1936. Also,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Japan strengthened the press control and put it into the mobilization system through the national mobilization law and the military discipline protection law. In this process, 『DongA Ilbo』 and 『Chosun Ilbo』 were moved into the cooperation of control system, and could not help getting involved in Japanophilism.
When Japan invaded Manchuria on June 18, 1931, the press policy was strengthened more than 1920s and it was implemented as the press control system of wartime. Accordingly, when Sino-Japanese War occurred, the press including the newspaper was used as the method of giving publicity required for the system of wartime. In such situations, 『DongA Ilbo』 and 『Chosun Ilbo』 which spoke for the nation did not criticize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but promoted and propagated it. Also, the contents of 『DongA Ilbo』 and 『Chosun Ilbo』 were equal to the tone of 『Maeil Shinbo』. In spite of such the tone of 『DongA Ilbo』 and 『Chosun Ilbo』, Japan planned ‘the press control policy’ and actually applied it. So, both newspapers ceased publication. All the while, experts tried to apply a dichotomy between ‘volunteering’ and ‘forced’ for the discontinuance of both newspaper, but the clear thing is that the discontinuance of both newspaper were closely related to the press control policy of Japan. After ceasing the publication of 『DongA Ilbo』 and 『Chosun Ilbo』, major journalists including executives of newspaper largely cooperated in the control system. In addition, many journalists were transferred to 『Maeil Shinbo』 as a journ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Their change of employment deemed to be related to the rigor of life, but it was sham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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