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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와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의 공교운동(孔敎運動)의 상이성(相異性) = Sung-hui Yi's Religion of Confucius and Ki-sik Song’s Movement for the Creation of a Confucian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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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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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3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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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공교운동을 시도하였던 한주학파의 문하인 이승희의 실천적인 구국활동 모습과, 같은 공교운동을 하였으나 공교수용 관점 및 활동 전개에 차이를 보인 해창 송기식의 활동을 비교 연구하여, 이들 활동의 특징과 사상적 관련성을 더욱 뚜렷하게 알아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은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주학파에서 공교활동을 한 인물 중에 시·공간적으로 학파의 가장 직접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종장 이진상의 아들이자 제자인 이승희를 모델로 삼고, 안동지역 유림으로 공교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나, 이승희와 활동의 차이를 보인 송기식을 대상으로 양자간 활동의 동이성을 추출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 이승희의 사상은 그의 학맥의 스승이자 부친인 한주학파의 종장 이진상의 ‘심즉리’ 사상에 영향을 받아 위정척사운동, 파리장서사건등 실천에 비중을 둔 활동에 참여한 바와 같이, 당시 유교의 사변적이고 비실천적인 성향을 극복하기위해 생성된 공교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동한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 주자학맥이었던 이승희는 종교로서 공교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유교 정신의 확산과 실천을 도모하고자 종교적 방법만을 활용하고자 하였고, 실천이념으로 전환하고자 공교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공교가 추구하는 일반적인 종교로서 확산시키지는 못하였다. 즉 이승희는 공교의 텍스트를 교리라 하지 않고 교과서라 하는 등 일반적인 종교의 색채를 거부하였고, 대중에 대한 일반적인 종교적 접근보다는 형식으로 서구의 종교를 수용하고, 전개 내용은 학술적이고 전통 도학자의 온건한 방법으로 윤리덕목으로 위기의 유교를 재구성 하였다. 이는 당시 흩어진 한인들이 정신을 집결하는 것으로 승화되기보다는 오히려 학술적인 이론이 일반 대중들에게 삶의 부담으로 작용되어 한인 공교회가 창립 3년간 조직의 정비 단계에서 머무른 채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3년간의 활동에 그쳤으나 이승희의 공교운동은 종교의 자리에 절대자와 영(靈)을 대신하여 공자의 정신인 윤리도덕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고수하는 전통 성리학자 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공교회를 통하여 종교의 형식과 교육 방법을 수용하여 일제기 민족에게 닥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인들의 계몽과 윤리도덕 형성에 노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당시 지식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승희의 활동 모습과 함께 비추어 본 송기식은『유교유신론』과 『인곡가』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이승희와 다르게 공자의 정신을 넘어선 공자를 절대자로 수용하는 일반적인 종교관으로 공교운동을 시도한 인물이다.
서구의 종교적 접근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공자를 절대자로 여겨 예배하는 등 일반적인 종교의 형식을 적극 수용하여 공교운동을 시도하였으며, 1930년 조선유교회 유교종교화운동에 이론을 제시하여, 비록 공교활동이 전통유교의 변용이었지만 일제기 동안 유학자들에게 힘을 주고 유교의 명맥을 이어준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송기식도 이승희와 같이 전통 유학자의 가문에서 출신으로 초년에 일찍이 의병으로 종군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구국 인재양성을 위하여 봉산서숙을 운영한 전통 유학자였다. 그러나 전통유학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유교변용인 공교를 수용하여 1930년에 전개된 안순환의 녹동서원과 조선유교회의 활동에 공교운동의 이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향인 안동에 와서는 전통사회를 혁신으로 함께 뚫고 나갈 협조자가 부족하여 혼자의 노력만으로 지속적 확산을 이루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양자의 공교활동 특징을 살펴보면 모두 구국의 개념으로 공교운동을 시도한 것에는 시각적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종교적 접근에 대한 근본 입장이 매우 달라 양자의 활동 전개와 효과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하여 이들이 시도했던 공교운동에서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통하여 그들의 사상적 영향에 대한 연관성과 이들이 각자의 삶을 적극 실천하게 된 정신적 원동력이 된 사상적 특징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활동의 진정한 공통점은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시대를 직시하고 전통유교 사회의 인식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움을 실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호국과 민족을 위한 자신의 결단과 실천적 모습으로, 신구학문을 두루 수용한 지식인의 융통성 있는 자세와 역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Confucianism formed the basis of the philosophy of the Choson dynasty (1392-1910), especially the Neo-Confucian School of Zhu Xi (1130-1200). Neo-Confucianism is a metaphysical philosophy of a highly speculative type, reflecting influences from both Daoism and Buddhism, and as such is remote from the lives and experience of ordinary people. At the time of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in 1910, this philosophy still remained the principal form of philosophical discourse.
The powerlessness of the last dynasty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which led to the annexation of the nation by Japan was attributed by many to the negativeeffect of Confucianism on the Korean state and nation. However, a number of Confucians considered ways in which Confucianism could be used to revive the nation. One method was to transform Confucianism by Westernizing or modernizing it. This approach had already been used by Chinese Confucian scholars as a way to counter the social and political influences of the West in China. Among these scholars the most outstanding were Kang Youwei (1858-1927) and his disciple Liang Qichao (1873-1929) who influenced a number of scholars in Korea. Representative Korean scholars in this tradition were Yi Sunghui (1847-1916, penname Taegye) and Song Kisik (penname Haech'ang).
In this essay, I have discerned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the approach taken by Yi and Song. Yi's family had been one of the most distinguished elite Confucian families of the entire Choson period. At the time of the annexation, he left Korea and went to Manchuria to build a new Choson society based upon the methods and experience of the modernizing Confucians of China. However, his 'modernizing'movement was based essentially on traditional Confucian thought with only a change in the method of educating people in Confucian thought. In other words, Yi's programme of 'modernization' did not represent significant change or reform.
Song was quite different from Yi. For one thing, his teacher was Kim Tohwa who had been a major leader of the Uibyong or Righteous Armies which fought against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Song was quite active in many different ways. He built a school for young students called the 'Pongyang sosuk(1909)', and was also a publisher of modern books, among which is an example of the 'New Novel' (sinsosol)by Liang Qichao. He also wrote two books of his own, the Ingok-ka(1930) and Yugyo yusil-lon [The Renovation of Confucianism, 1923].
In these three works, we can discern his method for reforming Confucianism. In effect, he wanted to reform Confucianism to become something like Christianity. First of all, Song conceived the philosopher Confucius to be a ’god’, like Christ in Christianity. Secondly, he thought of the hyanggyo or state-sponsored Confucian schools throughout the country to be places for the worship of Confucius. Thirdly, Song thought that students who studied at these schools should become like Christian preachers who would go and teach the nation's people about Confucian values. In later life, Song spent most of his time teaching particularly clever students at 'Noktong sowon' school(1930), which has been likened to a Christian theological college.
Both of these movements failed to achieve their intended purposes, the renovation of the Korean nation, perhaps because Confucianism as a system was confined to the limited class of scholars. However, among the two methods, Song's method seems to be the better one for the spread of Confucian ideas and conce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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