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강화교섭 시기 조선의 對日정책 = Chosun’s Policies Towards Japan in the Peace Negotiation Period During the Imji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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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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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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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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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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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발발한 임진왜란은 일본군이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침략하였고 이에 명군이 출병하여 1593년 1월, 평양성전투에서 명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어갔다. 명군은 일본군을 추격하다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함으로써 강화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였다. 명군의 입장에서는 굳이 손해를 봐가며 싸울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일본군의 입장에서도 酷寒ㆍ병량부족과 행주산성에서의 패배 등으로 피폐해진 군사로는 명나라 정벌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조선에 주둔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판단 하에 강화를 논의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양에서 패배하였지만 군사 및 병량을 보충하여 다시 북상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전라도 점령을 위해 우선 진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전라도를 점령하려는 목적은 그곳의 병량을 확보하여 다시 명나라를 향해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강화교섭에서 일본 측이 제시한 조건은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처로 삼는 다거나 조선의 4도를 할양할 것 등 처음부터 강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강화에 대한 논의가 나온 이후에도 전쟁을 멈추지 않고 목적 달성을 위한 군사행동을 지속하였는데, 군사 및 병량 부족을 보충하여 다시 북상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가 바로 그것이었다.
명ㆍ일 강화교섭의 허구성을 파악한 조선 조정은 명 조정에 이러한 상황을 직접 보고하려 하였으나 송응창 등 명군의 실책을 고발하는 격이었기 때문에 번번히 실패하였다. 따라서 조선으로서는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으니 일본군과 직접 교섭을 진행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전투를 감행하는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함안ㆍ양산 등지에서는 이빈ㆍ백사림ㆍ김응서-고니시 유키나가ㆍ나베시마 나오시게ㆍ야나가와 시게노부, 서생포에서는 사명대사-가토 기요마사의 교섭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를 통한 성과를 보면, 명일강화교섭에서 조선은 제외되었기 때문에 풍문으로만 파악한 강화조건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가토와 고니시를 이간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행한 일본군 공격은 웅천ㆍ거제주변의 연해지역에서 집중되었다. 1593년 2~3월 웅천해전, 1594년 3월 당항포해전에서 적선을 분멸하였으나 적군은 대부분 뭍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1594년 9월~10월은 도원수 권율의 지휘로 수륙합공작전이 개시되었으니 육장으로는 곽재우와 김덕령이 수군에 합세하였던 것이다.
강화교섭 시기 남해안은 양국 군사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명나라 측은 조선 측에 일본군 공격을 만류하는 상황이었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끊임없이 정탐하여 공격의 기회를 잡으려 하였다. 명ㆍ일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조선의 입장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일본군을 공격하여 패해도 문제이고 승첩해도 문제인 진퇴양난에 처해있었으며, 이는 교섭과 전투를 동시에 진행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The Imjin War broke out in April 1592. The Japanese army had invaded the whole of Chosun except Jeolla. The Ming Dynasty sent troops and they won a victory at Pyeongyang Castle battel in January 1953, which reversed the situation. The Ming troops chased the Japanese army, but they were defeated at Byeokjaegwan, which triggered the peace negotiation. The Ming Dynasty thought they did not need to fight battles, suffering losses. Japan also thought they could not only conquer the Ming but also station in Chosun because of their defeat at Haengjusanseong, bitter cold and a shortage of provisions. So, they started peace negotiation. Toyotomi Hideyoshi proposed conditions such as making the Chinese Royal princess the second wife of the Japanese emperor and ceding 4 Dos of Chosun to Jan pan, etc., which made the peace negotiation come to a standstill. Toyotomi Hideyoshi continued military operation to achieve his purpose. For example, he ordered his army to replenish provisions and move north and attach Jinju Castle to occupy Jeollado(the second Jinju Castle War in Jun 1953).
Having recognized the fictitious properties in Ming-Japan peace negotiation, Chosun’s royal court tried to report this situation to the Ming directly, but failed because they needed to accuse the Ming’s troops(e.g. Song, Eung-Chang, etc.) for their mistakes. So Chosun had to seek measures to save themselves so they tried to negotiate with the Japanese army directly. However, on the other hand, they fight battles (i.e. two-pronged policy). Negotiations proceeded between Lee, Bin, Baek, Sa-Rim, Kim, Eung-Seo vs. Konishi Yukinaga, Nabesima Naoshige and Yanagawa Sigenobu in Hamyang and Yangsan, and between Reverend Samyeong vs. Kato Kiyomasa in Seosaengpo. From the perspective of performance, since Chosun was excluded from the Ming-Japan peace negotiation, Chosun came to know the existence of peace negotiation through this and Chosun also alienated Gato from Koshini. Meanwhile, Chosun attacked the Japanese army in the coastal areas(e.g. Woongcheon and Geoje). They defeated enemy ships in Woongcheon sea battel(FEb-Mar 1593) and Danghang sea battel(Mar 1594), but most of the enemies took flight inland. In Sep-Oct 1594, Do marshal Gwon-Yool commanded amphibious operations, in which the army generals such as Gwak, Jae-Woo and Kim, Deok-Ryeong joined. During the peace negotiation, both nations confronted with each other in the southern coast. But the Ming held Chosun back from attacking the Japanese army, but Chosun kept spying on them to have the opportunities to attack. Chosun was in a awkward position, more precisely Chosun was in a fix because both winning and losing battles would bring problems to them. This is the reason why Chosun parallelled both negotiation and 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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