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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 활동- 김대건 신부 현양 및 양반중심 교회운영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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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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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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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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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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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67(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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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10월 페레올 주교가 조선대목구의 제3대 감목으로 조선에 입국한 후 1853년 2월 병으로 선종하기까지 약 7년 4개월 동안 수행한 그의 사목활동을 시기순으로 정리해보면, 첫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기해박해와 병오박해로 희생된 조선순교자 82위에 대한 현양운동, 둘째, 양반 신자들을 활용한 공소순방을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점 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과정에서 보여준 김대건 부제의 대담한 행동과 투철한 신심을 확인하고서 그를 동료 최양업보다 먼저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에 올려서 서해를 횡단하여 입국하였다. 그러나 입국한 지 7개월여 만에 김대건 신부가 선교사들의 해상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에 나갔다가 체포되고, 수감, 투옥되었는데, 이러한 전 과정을 김 신부의 편지를 통해 소상히 보고를 받고서도 김대건 신부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가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김대건 신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의 순교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1846년 11월 3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위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교회기록을 작성하고 여기에 그의 전임 앵베르 주교 때부터 조사해오던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의 기록을 더하여 유럽의 선교단체와 교황청에 전달하게 함으로써 1857년 조선순교자 82위가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도록 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야말로 김대건 신부에 대한 공식적인 현양운동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데에는 만주에서 함께 조선입국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만주 지역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왕조에 복음을 전하려던 페레올 주교의 선교전략과, 한반도와 만주를 아울러 우리민족의 동일문화권 내지 동일생활권으로 인식했던 김대건의 역사지리인식이 서로 합치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서 올린 서한을 통해서, 조정의 고관들이 한때나마 김대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파견하여 프랑스와 외교적 교섭을 추진하려고 했다가, 세실 함대의 성급한 회항(回航)으로 오히려 조정의 논의가 급변하여 결국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에 이른 과정들을 보고받으면서, 제국주의 무력을 활용한 조선왕조의 개방과 복음화 방안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외교교섭을 통한 선교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프랑스 동료 선교사들보다 앞서는 선구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의 여파가 잦아들자 곧바로 산재한 교우촌을 순방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성사(聖事)를 집행함으로써 교우들 신앙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주력했다. 이에 그는 여행길의 안전을 도모하고 교우들의 교리교육들을 이끌어갈 양반 출신의 지식인들을 자신의 수행원으로 채택하였고, 그중에 일부가 양반 특권을 과시하여 교우들간의 불화를 일으켜 최양업 신부가 그들을 배제하도록 건의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들을 옹호하고 그 비리를 묵인하는 등 양반신자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해갔다. 또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 곁에 대기하고 있던 다블뤼 신부를 공소순방길로 파견하다가 끝내는 사제가 없는 속에서 성사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로서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전력을 순방사목 활동에 쏟아 붓다가 끝내 체력이 소진하여 병사(病死)하기에 이르렀던 또 한분의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
더보기During the time for 7 years and 4 months, from coming into Choseon dynasty on october 1845 till on February 1853, Mgr. Ferréol the 3rd Apostolic Vicar of Choseon accomplished his two main duties of pastoral activity as follows ; one the paying reverence to martyr Rev. Kim Dae-geon Andreas and other 81 martyrs in the Gi-hai and Byeong-oh Persecution period of 1839~1846, the other keeping Catholic communities by regular visit to them under the guidance of Christians who was from the noble class Yang-ban and was the available catechist. Mgr. Ferréol has ordained deacon Kim Andreas priest earlier than his fellow Choi Yang-yeop Thomas, because of his dynamic and adventurous attitude and of deep faith. But 7 months after their coming, the priest Kim seeking the shipping road for French missionaries in the coast of Hwang-hae province was arrested by soldiers and was sent to prison owing to his air of authority originated from noble class. Despite of this pacts, Mgr. Ferréol's steadfast belief in priest Kim was not changed and he, without any criticism of it, started to reverence affair for priest Kim by writing the formal report of that priest and other 81 martyrs who were sentenced to death in Gi-hai and Byeong-oh Persecution period. Mgr. Ferréol sent the report to Roman Curia and European magazines for catholic missionaries, therefore the 82 martyrs in Choseon dynasty were declared to the world as Venerables(可敬者) in 1857. For this reason, we can call Mgr. Ferréol as the first driver of reverence affair for martyr priest Kim Dae-geon Andreas in Korean church history. Mgr. Ferréol's unchanged trust in priest Kim is originated from the fact that the consistence of their understanding about the Mantchourian province, especially of between Mgr. Ferréol's missionary strategy and priest Kim's opinions of historical geography. On the one hand this means having the intention of making advantage of the province as medium base for the propagation of Choseon dynasty or as the place of seminary building for Korean seminaries, and on the other hand it implies the thought that the province and Korean peninsula are one unit of cultural and living. Mgr. Ferréol has received the letter of priest Kim from the prison, and he became aware that the ministers of Choseon dynasty had tried to dispatch priest Kim as their special ambassador to the French warships and that they changed abruptly their plan due to such early cruising of the ships. Therefore Mgr. Ferréol gave up his idea of using the French imperial force for missionary works and advanced a theory of peaceful diplomatic negotiations. This change was very epoch-making thought and pioneering attitude toward the imperial force, compared with his comrade missionaries. Immediately after the ending of the persecution in 1846, Mgr. Ferréol has visited the catholic communities scattered all over the country and ministered the Sacrament for the sake of keeping their religious lives, and he made his efforts to this one. He adopted the Christians from noble stratum Yang-ban(兩班) as his close associates and shared his journey with them in order to ensure safety on the road and to get available catechist for all catholics in every secondary station Kong-so(公所). Because of these advantages, he denied the advice of priest Choi Yang-eop Thomas that he should drive the noble Christians away for their arrogant behavior against the catholics in Kong-so. Instead that he approved their misbehavior and sticked to support them. He also made his best to visit and minister the sacrament, in spite of his weakened and diseased body. Owing to this effort, he finally faced lonely death without any priest for him to minister sacrament. He forced priest Daveluy stayed at his sickbed to go to the catholic communities far away from him, despite of the priest's hesitation for him. He subordinate receiving his last rites to visiting his sheep by the priest. It was the real touching scene and his self-giving attitude was worth our while to call him“ the martyr of sw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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