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靑邱 金雨英의 현실 인식과 활동 -‘만세 변호사’ 활동과 조선인 안동부영사 역임을 중심으로- = Cheonggu Kim Woo-Young’s Recognition of Reality and Activities -With the Focus of the “Mansae Lawyer” Activities and the Role of the vice-Chosun Deputy Consul in Andong-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45-284(40쪽)
제공처
소장기관
This study attempted to examine the defens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s a lawyer of Kim Woo-young and later evaluate the activities of the vice-Chosun Deputy Consul in Andong. Kim Woo-young was born in Dongnae, Gyeongsangnam-do, and accepted newspapers early on.
Since then, Kim Woo-young has published an article in a Japanese magazine that affirms the emperor and criticizes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Chosun. However, since the readership of the magazine is Japanese, it is possible that it was selected as a way to gain sympathy with the reality facing young Chosun based on the understanding of the readership. He founded the Kyoto Chosun Student Friendship Association, served as an executive secretary, and published the organization’s journal, HakWoo. These activities show Kim Woo-young’s status and leadership in Kyoto.
After returning to Korea, Kim Woo-young served as a “manse lawyer” until he was appointed as the deputy consul of Andong and defended major independence movement events such as the 3.1Movement and the Daedongdan Incident. Kim Woo-young’s elaborate defense raised awareness among Chosuns. The increased recognition was used as a means of cultural governance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played a major role in Kim Woo-young’s appointment as the vice-Chosun Deputy Consul in Andong.
Kim Woo-young served as the only the vice-Chosun Deputy Consul in Andong. In the early days of his appointment, he helped the members of the Righteous Army or acquiesced in the help of his wife Na Hye-seok’s independence movement, and cooperated so that migrant Chosuns could be satisfied with living under the protection of the Japanes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However, the migration environment of migrant Chosuns did not improve, and only crackdowns and repression of independence movements were strengthened. In the end, Kim Woo-young was attacked by Kim Yong-ha in New York while traveling to Gumi and was branded as a pro-Japanese group.
After liberation, Kim Woo-young was arrested by the Anti-People’s Special Committee without rebelling at home, but complained of unfairness. The reason why he complains of unfairness is that he thought that complying under imperial Japan would not be a “self-interesting pro-Japanese group.” In other words, Kim Woo-young thought that he pursued “practical interests” for the Joseon people, and based on this, he rationalized his “pro-Japanese” problem. However, the improvement in education and industry he thought was made under Japanese rule, which is the biggest reason why he cannot escape the stigma of being pro-Japanese.
본 연구는 靑邱 金雨英의 도일유학시기부터 안동부영사로 재직했던 1920년대까지의 흐름을 따라가 김우영의 독립운동 변호와 안동부영사 당시 활동을 평가하고자 하였다. 김우영은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일본유학 초기에는 반일감정을 드러내었지만. 상해에서 서양인들의 횡포를 목격하면서 생각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김우영은 천황을 긍정하고 조선총독부를 비판하는 글을 일본인 잡지에 실었다. 다만, 잡지의 독자층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독자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 청년이 처한 현실에 공감을 얻는 방법으로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김우영은 교토조선인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고 간사로 활동하며 기관지 學友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교토에서 김우영의 위상과 지도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귀국 후 김우영은 안동부영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만세 변호사’로 활동하며 3·1운동사건, 대동단사건 등 굵직한 독립운동 사건을 변론하였다. 치밀한 김우영의 변론은 조선인들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높아진 인지도는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어 김우영이 조선인 안동부영사로 부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우영은 유일한 조선인 안동부영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부임 초기에 의열단원을 돕거나 아내인 나혜석의 독립운동 조력을 묵인하였고 이주 한인들이 일본 외무성 보호 아래에서 생활하는 데 만족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하지만 이주 한인의 이주환경은 개선되지 않았고, 오직 독립운동에 대한 단속과 탄압만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김우영은 구미여행 중 뉴욕에서 김용하에게 습격당하며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해방 이후 김우영은 자택에서 반항하지 않고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가 억울함을 호소한 이유는 제국 일본 아래에서 순응한 것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 친일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김우영은 스스로 조선 민족을 위한 ‘실리’를 추구했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친일 협력을 합리화하였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교육과 산업의 개선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그가 친일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