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한 간재에게 왕성한 시 창작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思無邪라고 하여 性情陶冶의 한 방편으로 중요시되었으니, 간재 역시 시를 전연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물이 문집에 남은 소량의 시다. 「화도」는 그 중의 하나다. 물론 간재는 李白을 필두로, 華西 李恒老, 牛山 安邦俊, 勉菴 崔益鉉, 尤庵 宋時烈, 金永植, 慕齋 金安國, 栗谷 李珥, 農巖 金昌協, 晦翁 朱熹, 遂翁 權尙夏, 河西 金麟厚와 같은 분들의 시를 이따금 한 편씩 차운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화도」는 양적으로 무려 6수나 된다. 마음먹고 붓을 잡은 연작임이 분명하다. 39살이 되던 1879년의 일이니, 고결한 삶을 노래한 陶潛에 대한 존경의 발로이다. Ⅲ장과 Ⅳ장에서 검토하였듯이, 첫 수를 제외한 다섯 수는 歸田園과 별반 관련 없는 도학자의 氣習이 노래되고 있다. 둘째 수를 보면, 우암이 가려 뽑은 朱子의 疏箚가 주된 소재로, 이를 顯宗에게 읽어보도록 청한 朴世彩까지 거론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四端을 밝게 알아 實踐躬行하라는 유교적인 가르침을 담았다. 넷째 수에서는 아예 송나라의 학자 蔡元定과 그의 아들 蔡沈을 백세의 스승으로 기리고 있다. 다섯째 수에서는 孔子를 필두로 朱子, 顔子, 曾子, 黃幹, 채원정 등을 두루 언급하면서 이들과 종유해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꾸렸다. 여섯째 수는 시절을 한탄하는 작품으로, 王道政治를 구현할 수 있는 현인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깃든 대표적인 연작시로 지목해볼 수 있다. 기존 시인들의 和陶詩와는 전혀 다른, 간재만의 「화도」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간재는 실제 여러 海島를 물색하기도 하고, 미리 군산도와 왕등도 등지에서 거처한 적이 있다. 그 후 1912년 9월, 간재는 72세의 나이로 繼華島에 이주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는 도잠이 실현했던 귀전원의 계승이었으니, 간재가 일찍이 「화도」를 지었던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계화도 은거의 단초를 미리 내보인 작품으로 지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