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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의 해방전후 음악활동 고찰 = Consultant of Iwangjikyangyakbu, Lee’s path after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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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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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는 음악교육자·작곡가·지휘자·아악 전문가이자, 군인이다. 1930년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로서 해방 이전에는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모든 음악 경력을 접고 군대에 들어가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해방을 기점으로 격변한 인생사를 반영하듯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반되게 나타나 있다. 음악인 이종태는 친일 및 전쟁협력 단체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물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 군인 이종태는 1958년 국방부장관 공로표창, 1966년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현재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음악인 이종태는 서양음악, 궁중음악, 음악교육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수십개의 음악 단체에 소속되었으며, 식민지 관변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중동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이화여자전문학교, 이왕직아악부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경성관현악단, 영미합창단 등에서 지휘를 하였다. 1930년 <소년>이라는 작품을 작곡한 이래, <내일>·<그리운 소년>·<우리들은소년>·<김소좌를 생각함>·<총 후> 등의 친일 작품을 양산하였다. 『보통학교조선어독본』을 토대로 음악 레코드를 제작하거나, 경성방송 ‘군가공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전시 시국 가요를 교육 보급시켰고 강연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왕직아악부에 10여년을 재직하면서 서양음악 교육과 오선보 채보사업에 관여하며 아악 전문가로 행세하고, <기미가요>와 <우미유카바>를 아악기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는 등 이왕직아악부의 친일활동을 지원하였다. 일제강점기 음악계에서 보여준 활동 내용과 양상은 놀라운 정도이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이종태는 해방이 되자, 초창기 대한민국 군대와 군악대가 만들어질 당시 42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예대 창설에 관여하였고, <상이군인의 노래>·교향시<조국찬가>·교성시<광복10년> 등을 군대 내의 음악 행사를 맡기도 하였다. 군인이라는 신분 제약이 있어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하였다. 태세 전환에 성공하면서 친일 행적은 감추어져 국가유공자로 대접받았으며 사후에 부인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와 나란히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던 과오를 이종태라는 인물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Lee Jong-tae was a music educator, composer, conductor, and soldier. Lee, an intellectual and a graduate of Japanese Music School(日本音樂學敎) in 1930, worked actively as a musician before liberation. After liberation, he gave up his career in music and joined the army and was appointed as a brigadier general. As if reflecting the dramatic convulsion of his life after the liberation, historical evaluations on Lee have conflicting arguments.
Lee as a musician was listed in the pro-Japanese Biographical Dictionary as a result of activities as a pro-Japanese and working with war cooperation organizations. On the other hand, Lee as a soldier had a successful career, being commended for his service by the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in 1958, and receiving an 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 Cheonsu Medal in 1966.
As this research is the first to study Lee, we examine Lee's musical activities, and take a brief contemplation on projects he put parts in as a commissioned consultant of Iwangjikyangyakbu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Lee as a musician worked in all areas including Western music, court music, and music education. He was a member of dozens of music organizations, and worked in a colonial government organization. Under a war footing, he distinguished himself in pro-Japanese groups and thereby entered major musical circles. Furthermore, after joining the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he participated in the project of the Staff(stave) transcription as an expert of court music during ten years of his incumbency as an editor of omnifying court music (‘A-akumbopyeonchansamuimsichoktak’ 雅樂音譜編纂事務臨時囑託). He also actively supported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the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by rearranging Kimigayo and Umiukaba to be playable for court instruments.
His decision to change his stance after liberation was surprisingly quick.
In the early 1947, when the Korean military and military band were formed, he joined the army at the age of 42. He became a military band master in the eighth regiment and after the recapture of Seoul in 1950, he participated in establishing the KAS (Korean Army Arts Service 陸軍軍藝隊). Since then, he was unable to actively engage in music due to his status as a soldier. However, he did not stop interacting with musicians until 1970, revealing his presence at international music festivals. Since 1961, when he was serving as the head of the National Cemetery, he cooperated with the National Gugak Center to hold Confucian ceremonies in the National Cemetery on Memorial Day.
It is desperately necessary to criticize Lee's pro-Japanese activit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reflectively view the fact that Lee has never been discovered until now and is still presently being treated as a man of national me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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