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과 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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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09년
작성언어
Korean
자료형태
한국연구재단(NRF)
따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주인공 쑨위에는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허징푸에게 자신의 사상적 혼란과 그로 인한 두려움을 고백한다. 그런데, 쑨위에는 그 두려움의 원인으로 ‘문화대혁명의 결과와 원인 모두가 우리 앞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점과 그와 관련하여 ‘자신이 신봉해 왔던 것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허징푸는 ‘너는 머리와 입을 가지고 사고하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를 건넨다. 작품의 핵심적 주제를 반영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즉각적으로 칸트가 제기했던 ‘계몽의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이러한 미성년 상태는 오성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오성을 스스로 사용하려는 결과과 용기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쑨위에의 불안과 허징푸의 위로는 붕괴된 신화에 근대적 오성을 마주세우고자 하는 중국판 계몽의 선언이자 휴머니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진단과 처방이 80년대 중국을 위해 유효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회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허징푸의 위안이 유효성을 지닌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저자의 작품 속 문혁 재현 전반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작품 속의 문혁 재현 속에는 작품 외적인 정치적 고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자체 검열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작품 전체를 통해 조반의 흔적이 지워져 있거나 쉽게 알아채기 어렵도록 위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문화대혁명 당시 조반파였지만 작가가 투영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쑨위에는 보수파로 그려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의 발언과 행동, 내면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조반의 그림자들은 손쉽게 알아 챌 수 없게 변조되어 있다. 이러한 사례는 허징푸나 쉬헝종과 같은 나머지 작중 인물들 속에서도 다양하게 발견되며,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작품 전체에 이 일종의 ‘금기’에 대한 은폐와 위장의 의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러한 자체 검열(조반자의 소실)에 준하는 현상이 따이호우잉이라는 작가의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문화대혁명과 신시기 전체를 아우르는 중국 사회의 핵심적 문제 즉, 당에 저항하려 하는 대중의 존재를 은폐하고 이를 통해 문화대혁명의 본질적 문제가 갈등이 지식인(문화인)과 당 사이의 갈등에 있었던 것처럼 위장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신시기 지식인들의 문혁 재현 속에서 조반자의 소실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근저에 신시기 지식인들과 신시기 중국 공산당 사이의 모종의 은밀한 연대가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당과 사회주의에 대한 허징푸의 첨예한 비판이 작품 후반에 이르면 어느새 덩샤오핑의 목소리로 변조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리저호우의 계몽에 대한 초기 주장이 ‘계몽과 봉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양재택일적 패러다임 속에서 무한히 확장되고 절대화됨으로써 이른바 ‘계몽의 협박’이라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과 동질적인 것이다.
오늘날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문제를 몇 가지 기술적 처방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간주하는 신시기 덩샤오핑주의의 근본적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문혁이 제기했던 대중의 정치적 분출이라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기술적 대처가 불가능한 역사의 방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확신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다. 만일 여전히 인민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지난했던 역사의 경험을 통해 얻어 낸 것이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는 대중의 정치적 분출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법적 차원의 깨달음에 불과한 것이라면, 중국 사회의 미래는 지극히 비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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