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 연합운동 역사 연구 (1884-1945)
저자
발행사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역사신학 2008
발행연도
2008
작성언어
한국어
DDC
275.19 판사항(21)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iv, 332p.; 30cm
일반주기명
영문 초록 수록
참고문헌: p.312-328
소장기관
한국 개신교는 선교초기부터 여러 교단 및 교파의 선교사들의 복음전래로 인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여러 교파 교회들이 이 땅에 이식되어 각기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복음전래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이다. 특별히 초기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연합정신 정신으로 무장하여 교회연합을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경주하다가 생을 마치기도 했다.
1929년 󰡔기독신보󰡕의 편집인 하디(R. A. Hardie)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연합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연합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36명 중 네 명만이 연합에 반대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찬성은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문지를 받은 나머지 42명의 지도자들이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감리교회 해외선교부의 서더랜드(G. F. Sutherland)는 1931년 한국에서 귀국한 후, “미국에 있는 우리가 한국에 대하여 행한 가장 큰 실수는 한국을 동양에서 중요하지 않은 곳이요 하찮은 민족이라고 생각한 것...한국은 중심에 있고...한국은 극동아시아의 미래의 어떤 평가에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후 교회연합에 대한 열망과 아시아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진작 한국에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지 못했을까? 장로교회의 ‘독노회’ 조직 전, 즉 1905년 ‘재한개신교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 출범 후에 장․감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브라운(G. T. Brown)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장․감의 미국 본국의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두 감리교회가 한국에서 아직 하나의 감리교회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고, 각 교회가 본국의 연회의 소속으로 있었다. 남감리교회의 해외선교 실행위원회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보다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통치형태를 취하고, 어떤 신조를 포함하고, 한국에서 장․감의 다른 견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에 대한 의문만 제기했을 뿐이다. 둘째는 한국 교회 지도자도 또한 이것에 대한 열의가 부족했다.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이 문제를 1906년 연례모임을 통해서 논의하고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한 이후에’ 다시 거론하기로 연기하였다. 그들은 이 문제는 선교부 보다는 교회가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지만, 이것이 독노회나 총회에서 한 번도 투표를 한 적이 없으니 선교사들의 전적인 지원 속에서 이 건이 통과되었다는 것이 큰 의구심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고 브라운은 지적한다.
브라운의 이 분석은 의미가 있다. ‘재한개신교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는 1912년 명칭을 연합공의회(the Federal Council)로 바꾸었는데, 이때는 장로교가 총회를 조직한 시기와 맞물리며 새 명칭으로 출발한 연합공의회의 목적에는 ‘하나의 교회’를 구성한다는 것조차 제외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 본국교단 및 교파에서의 반대,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미성숙함 등이 결부된다,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여 한국에서 ‘하나의 교회’ 설립은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연합정신을 비롯하여 본 논문에서 전개한 여러 다양한 연합사역들마저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의미와 가치를 살펴보았는데, 먼저 III장에서 의료선교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것의 공헌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다른 사역에 비해서 힘겨운 일이었고, 헤론과 홀과 같이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는 희생이 따랐고, 이런 헌신적인 일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주는 귀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민족에도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의료선교를 통한 연합사업은 병원 설립 및 의학교육은 물론 콜레라, 결핵 및 나병 등 전염병 퇴치, 의사협회 및 간호사협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뤄졌다. 이 사역을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한국교회가 감당하기까지는 20세기 후반에야 가능할 만큼 긴 세월이 필요하였다.
의료선교가 선교의 문을 열어주었고, IV장에서 살펴본 교육선교는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을 다지고 훈련시켜서 장성하게 한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교육에서의 연합사역도 중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신학교 및 대학, 그리고 주일학교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장․감이 각기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배경에는 각 교단이 ‘하나의 신학교’를 연합으로 설립함으로 이뤄진 쾌거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연합정신의 역할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렵게 연합학교를 이룩했다가 각기 교단 및 교파의 단독 운영으로 돌아간 평양연합대학(숭실전문)과 이화여대(이화여전)와 같은 경우도 있는 것이 아쉽고, 오늘까지 연합학교 사역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연세대학교 하나뿐이다.
V장에서 본 문서선교에 있어서 연합정신도 성경번역 및 출판으로 시작하여 찬송가 출판, 성경주석, 신문과 잡지 및 이 모든 것들을 인쇄 및 출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이뤄졌다. 문서선교에서도 교육선교와 같이 한 번 이룬 연합사역이 성서번역 및 출판이나 예수교서회 또는 󰡔코리아미션필드󰡕와 같이 줄곧 이어진 경우도 있지만, 힘겹게 연합 사업을 이루었다가 각 교파의 독자적인 사업으로 돌아간 찬송가 출판과 연합신문이었던 󰡔기독신보󰡕와 같이 아쉬운 일도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연합 사업이 결렬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그 원인은 판권을 둘러싼 이윤과 서북지역과 비서지북 지역의 교권싸움, 또는 한국교인들과 선교사들과의 깊은 감정의 골 등이었다. 연합정신의 근본을 잃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말았다.
VI장에서 본 한국 초기교회의 사회참여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이 사회를 지도하고 이끄는 지도력을 크게 발휘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특별히 민족이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을 분명하게 나타내며, 교회의 지도력을 한층 발휘하는데 온 교회가 연합하였다. 그것은 남존여비 사상에 뿌리 깊은 전통문화 속에서 남녀평등의 기회를 잃고 있던 여성들을 위한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년운동, 애국충군의 모습을 보였던 고종의 보호와 탄신일 축하, 한일병탄을 전후한 항일운동에 교회가 연합하여 참여하였고, 3.1운동 이후에는 절제운동과 농촌사역을 중심으로 민족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사회계몽 운동에 교회가 연합하여 참여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자절제회와 YWCA를 비롯한 몇몇 여성단체들의 사회참여로 인해 더욱 교회의 빛을 발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인해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VII장에서는 교단 및 교파 간에 기구(institution)를 통한 연합운동이 전개된 것도 살펴보았다. 특히 여러 교단이 비슷한 시기에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한 장․감이 시기적 차이는 있었지만 이 땅에 각각 ‘하나의 장로교회’와 ‘하나의 감리교회’로 통합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이 각기 총회를 조직하기 전에 선교사들이 자기들만의 공의회를 시작하였고, 점차 한국인들이 그 모임에 참여하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조직한 장감연합협의회가 탄생하고, 급기야 장․감 외에 동양선교회(성결교)와 Y와 여자절제회 등을 비롯한 여러 기독교 단체들이 참여하는 범에큐메니칼(pan-ecumenical) 기구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까지 출범하였으니 짧은 선교역사 안에 올린 적지 않은 연합 사업의 성과라 하겠다.
여기서 매우 아쉬운 역사의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선교부공의회가 구성되고 장․감연합협의회가 조직되기 전, 장․감이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들이 반대하고, 선교사들 가운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한국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등이 지적되었지만, 역시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미국교회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인해 이 땅의 교회가 어쩌면 영원히 교파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한 선교사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선교부연합공의회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로 통합되었으면서도, 그들만의 모임을 끝까지 지속함으로 연합 운동의 취지를 약하게 만든 것이다. 교단 및 교파 간의 연합 운동은 이렇게 기구를 통해서도 이뤄졌지만 더불어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에 대응하는 일에도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평양의 관리들에 의해 생명까지 위협을 받은 기독교인들을 구명한 것과, 사상적으로 교회를 위협했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응한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연합운동을 전개해왔지만, VIII장에서 본 바와 같이 1930년대 이후 일제 말에 이르러 연합운동은 점차 쇠퇴하고, 각기 교파주의로 회귀하고 말았다. 장․감은 각각 1932년과 1934년 교파를 초월한 합동을 추진하기 위해 각각 다섯 명의 대표를 선정하기까지 했으나, 1934년 장로교총회에서 연합공의회 해소 건이 제출되더니 1935년 총회에서 연합공의회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만 것이다. 장로교총회가 교단 규모에 비해 총대수가 적은 것에 불만인데다가 기독교단체들을 제외한 교파들만의 모임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감이 꿈꾸고 협력해 오던 연합은 끝내 무산되고, 연합 사업 현장에서 충돌이 일어나며 예양협정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장․감을 중심으로 각 교파 교회가 연합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며 정착하는데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만큼 각 교파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신흥우를 중심으로 발생한 적극신앙단의 등장은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서북과 비서북 지역의 갈등을 폭발시키며 나아가 선교사와의 갈등마저도 불을 붙이며 연합운동에 찬물을 던지고 말았다. 이는 곧 본론에서 서술한 찬송가 출판의 연합사업의 막을 내리게 했고, 󰡔기독신보󰡕도 끝내 종간하게 만들고 말았다. 여기에다 그동안 힘겨움 속에서도 강요가 심하지 않았던 신사참배 문제가 일제의 태평양 전쟁 준비에 박차와 더불어 극성을 부리고, 이에 대한 장․감의 대응이 엇갈리며 연합의 길은 더 요원하게 만들었다. 1940년대에 이르러 선교사들은 이제 철수를 해야만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일제는 조선기독교단이라는 어용 연합기구를 만들며 교회연합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을 ‘하나의 교회’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이상이 본 논문에서 다룬 초기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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