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九州地域의 朝鮮 被虜沙器匠 硏究 = A study on the performance of Chosun potters who were taken away to Kyushu area, as prisoners of war
저자
발행사항
춘천 : 강원대학교, 2008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강원대학교 일반대학원 : 사학과 2008. 8
발행연도
2008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강원특별자치도
기타서명
A study on the performance of Chosun potters who were taken away to Kyushu area, as prisoners of war
형태사항
173 p.p. 26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손승철
참고문헌 : p.
소장기관
文禄の役と慶長の役(1592∼1598)の時期に九州の各藩や長州の大名は朝鮮から撤収する過程で競争するように陶工を捕まえて帰って来、それぞれの領内に窯を作らせた。その理由としては、当時、大名たちの間で茶道が流行しており、特に薩摩の島津義弘、豊前の細川忠興、長門の毛利輝元、肥前の加藤清正は皆、千利休の門下茶道人で、各々朝鮮の茶碗、茶を盛る器などを貪って自分の領地内で趣向に当たる茶器を作った。また同時に、陶磁器の生産によって領地の産業復興を図ろうとしたからであった。
朝鮮沙器匠らは当時、良い陶磁器(茶碗など)を持ちたがった日本人たちの長年の所望を非常に熱心に、そして誠意ある努力をもって達成するようにした。
文禄の役と慶長の役が所謂、陶磁器戦争だと称されることもあるが、その理由は、この期間の間、日本全国の大名らによって引っ張られていった朝鮮沙器匠らによって 日本磁器の歴史が始まったからである。
今まで韓国の多くの学者たちがこの時に引っ張られた沙器匠たちによって日本の陶磁器文化が絶対的に発達するようになったと主張しているが、日本の学者たちの中で一部は他の主張をしている。従って、本論文では、当時朝鮮の沙器匠らがどのように引っ張られて定着するようになったのか、それから、果して彼らが日本の陶磁器に及ぼした影響はどの位なのかを考察することに研究の目的がある。
本研究のために現存する文献と史料などを根拠に下の三つの方向から考察・分析を行った。
1.文禄の役と慶長の役(1592∼1598)の時に数多くの被虜人が発生した。これら被虜人が発生した原因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いと思う。これら被虜人の中で朝鮮沙器匠が日本九州の各地域へ引っ張られ、有田、唐津、高取、上野、竪野、苗代川などの陶祖になった。これら引っ張れた朝鮮沙器匠らがどの地域に定住したのか、彼らが日本陶磁器に与えた影響について調べたいと思う。また彼らの日本での生活を考察してみたいと思う。
2.日本九州の各地域へ引っ張られていった朝鮮沙器匠の中で一番多い沙器匠が引っ張られた地域は薩摩である。薩摩地域には領主島津義弘によって被虜人の中で一番多い数の朝鮮沙器匠が引っ張られた。
従って、本論文では金海、朴平意などにより始まった薩摩焼を朝鮮沙器匠の史跡と影響を中心に調べてみたいと思う。
3.朝鮮沙器匠李参平により始まった有田焼は九州各地域の陶磁器の中で一番発達した。朝鮮沙器匠の影響以外にも、有田地域で陶磁器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たもう一つの要因である地理的、時代的特性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いと思う。
文禄の役と慶長の役(1592∼1598)の当時、日本軍によって多数の被虜人が発生しており、これら中には多くの数の朝鮮沙器匠があった。
これら被虜沙器匠らは日本九州の各地域で陶磁器業に携わった。これらの中で一部は有田、唐津、高取、上野、竪野、苗代川等の陶祖になった。幾多の朝鮮の沙器匠らが日本に引っ張られていったが、彼らの史料が残っていないので、すべて明らか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名前が明かになった各地域の被虜沙器匠は次の通りである。
(1)福岡県
慶尚南道泗川で加藤清正に捕まって来た尊楷[上野喜蔣]が上野焼の陶祖になり、慶尚北道高霊で黒田長政に捕まって来た八山[高取八山]が高取焼の祖になった。
(2)佐賀県
忠清南道鶏竜山錦江付近で鎬島直茂の家奴に捕まって来た李参平[金ケ江参兵衛]は有田窯の陶祖になった。
慶尚南道金海で後藤家信に捕まって来た宗田[深海新太郎]が内田山諸窯の陶祖になった。百婆仙[百婆仙]は宗田と一緒に捕まって来た彼の妻である。
(3)鹿島県
慶尚北道高霊郡星山島津義弘に捕まって来た金海[星山仲次]は竪野窯の陶祖になった。
慶尚北道高霊郡星山で島津義弘に捕まって来た卞芳中[星山仲次郎]は帖佐窯の創業に携わり、民窯の手始めである竜門司窯の陶祖になった。
全羅北道南原で島津義弘に捕まって来た朴平意[朴氏清右衛門]は苗代川窯の陶祖になった。
申武信[田原万助]と申主碩[田原友助]は金海[星山仲次]を手伝って竪野窯で陶業に携わった。
薩摩に定住した張一六[仲地麗仲]は陶法伝授のために万暦14年(1616)琉球に渡って行き、湧田窯の陶祖になった。
(4)長崎県
慶尚南道昌原郡熊川面で日本武将である松浦鎮信に捕まって来た巨関[今村弥次兵衛]は平戸焼の陶祖になった。
朴正意[小山田佐兵衛]は百実窯の陶祖になった。
大村喜前に捕まって来た李祐慶[中野七郎右衛門]は波佐見焼の陶祖になった。
(5)山口県では被虜沙器匠李勺光が松本で開窯し、李敬は[坂助八]、[高麗左衛門]は李勺光の弟でこれら萩窯の陶祖になった。
これら被虜沙器匠らは九州各諸藩主の領土内で築窯して陶磁器を焼けるように特別な厚遇と保護を受けた。
日本の江戸時代には被虜沙器匠らの待遇が良い方であった。大抵、刀をさすことができる士族に準する身分としてもてなした。付加価置が高い陶磁器を生産する被虜沙器匠らは藩でも貴重な存在に違いなかった。そして被虜沙器匠をリーダーに任命し、彼は士族として待偶した。それ以外の被虜沙器匠らに対しては、それに準する身分を与えた。
始めに、佐賀県へ引っ張られて来た被虜沙器匠李参平は多久藩に任せられ、藩主である家久(安順)の命令で西の原梅野(多久南方)で窯を作り、陶磁器を作り始めた。良質の粘土を求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藩主の許可を得てだんだん場所を移して窯を作り、製作を試みた。1616年(元和16)李参平が38歳の時に有田上白川の泉山で白磁鉱を見つけ、こちらに天狗谷窯という窯を作った。これが日本磁器の手始めであった。
1616年日本最初に白磁を製作した所として明らかにされた天狗谷窯は丘上に階段式間がある登窯構造で、韓国の広州仙東里窯の階段式登窯を模範と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匣鉢と支釘などの窯道具もやはり似ており、発掘された陶磁片として、白磁鉢、お皿、瓶と青華白磁のお皿、瓶そして青磁等が光州の16世紀後半観音里窯の焼き跡から出た白磁のお皿、瓶、お皿等と底部、形態などが一致している。
1616年(元和16)李参平が有田上白川の泉山で磁鉱を見つけ、その地に天狗谷窯という窯を作って磁器を焼いたのが日本白磁の手始めであった。しかし、伊万里地域の磁器が発達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次のような理由があったからだと考えられる。
1.明朝末期の政情不安、動乱に起因した中国の経済変動があった。
2.景徳鎭窯の衰退、明朝の滅亡と共に景徳鎭で陶磁器を生産しなくなった点。
3.国と交易した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が交易地を景徳鎭から有田に切り替えた点。ヨーロッパの商人たちが見本を持って来て有田で作るようにした。
4.伊万里港を通じる210年間(1645∼1855)にわたった貿易があった。
本研究を遂行するにあたって序論で明らかにした研究の限界を飛び越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ておく。
文献資料や遺物資料に根拠を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が、被虜沙器匠の事例を具体的に証明することができる確かな史料を探すことはとても難しい。残念ながら、日本に連行された朝鮮沙器匠に対する韓国側の史料がほとんど残っていない実情である。資料と研究が充分でないせいによって今まで私たちは被虜沙器匠の後裔らを捜そうとする努力が不足で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本論文で新しい史料が発見されたことではないが、九州地域に分布されている被虜沙器匠らの中で名前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る人々を整理する作業だけで意義を置きたいと思う。
일본 磁器의 역사는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의 기간(1592∼1598) 동안 일본 다이묘(大名)들에 의해 끌려간 被虜沙器匠들에 의하여 日本 磁器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일명 陶磁器戰爭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이 이때 피납된 조선 피로사기장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연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당시 피로사기장들이 어떻게 피납되어 정착하게 되었는지와 그들이 일본의 도자기 문화에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 인지를 고찰하는데 目的이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사기장의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자료가 수집된 각 지역의 피로사기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쿠오카현(福岡縣)에서는 경상남도 사천에서 가토우 키요마사(加藤淸正)에게 잡혀온 尊楷[아가노 기조(上野喜蔣)]가 아가노 도자기(上野燒)의 陶祖가 되었고, 경상북도 고령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게 잡혀온 八山[다카도리 하치조(高取八山)]은 다카도리 도자기(高取燒)의 陶祖가 되었다.
사가현(佐賀懸)에서는 忠淸南道 鷄龍山 錦江 부근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鎬島直茂)의 家奴에게 잡혀온 李參平[가나가에 산베에(金ケ江參兵衛)]이 아리따 도자기(有田燒)의 陶祖가 되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에서 고토우 이에노부(後藤家信)에게 잡혀온 宗田[후카미 신타로(深海新太郞)]이 內田山諸窯의 陶祖가 되었다. 百婆仙[하쿠바센(百婆仙)]은 宗田과 같이 잡혀온 그의 처이다.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서는 경상북도 고령군 星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金海[호시야마 나카지(星山仲次)]가 타테노요(竪野窯)의 陶祖가 되었다. 경상북도 고령군 星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卞芳中[호시야마 나카지로우(星山仲次郞)]은 쵸사요(帖佐窯)의 창업에 종사하였고, 民窯의 시작인 류몬지요(龍門司窯)의 陶祖가 되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잡혀온 朴平意(朴氏淸右衛門)는 나에시로가와(苗代川)窯의 陶祖가 되었다. 申武信[타와라 만스케(田原万助)]과 申主碩[타와라 토모스케(田原友助)]은 金海[호시야마 나카지(星山仲次)]를 도와 타테노요(竪野窯)에서 陶業에 종사하였다. 사쓰마(薩摩)에 定住했던 張一六[나카치 레이나카(仲地麗仲)]은 陶法전수를 위해 1616년(萬曆 14) 류큐(琉球)에 건너갔다가 레기타요(湧田窯)의 陶祖가 되었다.
나가사키현(長崎縣)에서는 慶尙南道 昌原郡 熊川面에서 일본 장수 마츠우라 마사노부(松浦鎭信)에게 잡혀온 巨關[이마무라 야지베에(今村?次兵衛)]은 히라도 도자기(平戶燒)의 陶祖가 되었다. 朴正意[오야마다 사헤에(小山田佐兵衛)]는 햐쿠비요(百實窯)의 陶祖가 되었다. 또 오오무라 요시마에(大村喜前)에게 잡혀온 李祐慶(中野七郞右衛門)은 하사미 도자기(波佐見燒)의 陶祖가 되었다.
야마구찌현(山口縣)에서는 피로사기장 李勺光이 마츠모토(宋本)에서 開窯하였으며, 李敬[사카 스케하치(坂助八)?코우레이자에몽(高麗左衛門)]은 하기 도자기(萩燒)의 陶祖가 되었다.
이들 피로사기장들은 큐슈(九州)지역 각 諸藩主의 영토 내에 가마를 지어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특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고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는 士族에 준하는 신분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보호인 동시에 감시?통제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피로사기장들의 조선풍습과 언어를 유지시킴으로써 유사시에 통역의 역할도 맡기려고 했다.
被虜沙器匠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이유가 도자기 제작에 있었던 만큼 그들이 일본의 도자기 제작기술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한 나라의 도자기 제작기술의 수준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소성기술인데 이것은 가마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壬辰倭亂 직후에 일본으로 납치된 피로사기장들은 가마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일본의 도자기 가마 구조를 조선식 가마인 有段式 連室登窯로 바꿈으로써 도자기의 대량생산과 고화도 磁器를 구워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자기를 제작함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원료가 되는 점토인데 일본 자기의 원료가 되는 백색 점토의 발견이 바로 조선의 피로사기장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점토는 소지에 가소성을 제공하고 성형된 기물의 성형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소성된 후에는 유리상을 형성시켜 도자기가 사용될 때 강도를 유지하며 기물이 백색의 투광성을 띠게 하는데 기여한다. 磁器의 원료인 백색점토의 발견으로 일본 陶磁器는 陶器에서 磁器시대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피로사기장이 일본의 도자기 생산에 개입되면서 조선의 도자양식과 가마구조가 九州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象嵌靑磁를 비롯하여 粉靑沙器의 剝地紋?철회문?상감문?인화문?분장문 등과 같은 다양한 장식기법과 성형도구 그리고 조선식 가마재임법 등이 일본의 도자기에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일본 도자기의 발전에 있어 조선에서 끌려간 피로사기장의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陶祖로 칭송받을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고에서는 특히 일본 아리따(有田)지역의 도자기가 발달하게 되는 데는 앞에서 제시한 조선 피로사기장의 역할 외에도 당시 일본의 시대적?지리적 상황도 요인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첫째 큰 배가 출입할 수 있었던 이마리진(伊万里津)이 가까이에 있었던 점. 둘째 에도(江戶) 중기의 서민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도자기 수요층이 확대된 점. 셋째 明末?淸初의 불안한 中國의 정세와 그에 따른 景德鎭窯의 쇠퇴로 인하여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대상지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변경된 점. 넷째 1645년에서 1855년까지 210년간 계속된 일본의 무역활동의 성행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임진왜란을 전후로 일본에 끼친 조선도자기의 영향을 조선에서 끌려간 피로사기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큐슈(九州)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朝鮮 被虜沙器匠들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정도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쟁 중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사기장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史蹟을 찾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이들 피로사기장과 그들 후손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계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며 향후 피로사기장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층화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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