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 皇帝의 肖像 : 近代 시각매체의 流入과 御眞의 변용 과정
저자
발행사항
서울 : 弘益大學校 大學院, 2006
학위논문사항
學位論文(博士) -- 弘益大學校 大學院 , 美術史學科 韓國近代美術史專攻 , 2006.2
발행연도
2006
작성언어
한국어
DDC
757 판사항(20)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iv, 175 p. : 삽도 ; 26 cm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pp.13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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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기관
Gojong(1852-1919) was an emperor of the time when Korea started to change into a modern nation under the pressure of Japanese and Western imperialism. Between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 early 20th century he ruled over Chosŏn, new media such as oil paintings or photographs were introduced while the traditional fine arts continued. Gojong came in contact with such new media earlier than any one else. Accordingly, various portraits of him including traditional portraits, photographs, illustrations, and oil paintings were produced at that time, especially at the period of Daehan Empire(大韓帝國: 1897-1907). Among those portraits, some were drawn by the orders of Gojong himself while others were produced by the orders of Japanese, missionaries, ideologists of enlightenment thought, etc. This paper studies on the significance these new visual media had at the period of changing into modern times and their functions through various portraits of Gojong.
In the Chosŏn Dynasty, the portraits of kings functioned as means of ritual ceremonies commemorating the preceding kings and as symbols of the orthodox royal authority at the same time. Producing the portraits of kings at that time was a kind of event for the royal family. The best painters took charge of the task and king had discussions with ministers in order to make the portraits best. After the royal portraits are completed, they were enshrined in the royal portrait hall, so people couldn't see them at all, unlike China where people could see the emperors' portraits in wood prints or picture albums.
It was not until 1880s when such traditional functions of royal portraits were changed. After forming a good relation with America in 1882, Gojong had a photograph taken for the first time and delivered it to the American diplomatic minister by course of exchanging the portraits of rulers between two countries forming relations. Since then, royal portraits had functioned as symbols of the country. And such changes of their functions were related to introduction of photographs to Korea in 1880, which was a part of Gojong's enlightenment policy to make Chosŏn wealthy and powerful by accepting Western technologies. Though the outbreak of the Reformist (Military) Revolution in 1884 prevented introduction of photography to Korea, the portraits of Gojong gave an opportunity of not only changing the function of royal portraits but also attracting interest in the realistic representation of the portraits.
In 1890s, Gojong's portraits were distributed to the people to stir up national consciousness. After the Sino-Japanese War (1894), King Gojong's image in wood prints, Nisikie, was used as a means to justify Japan's invasion upon Chosŏn in Japan, while domestically, it was also recognized as a symbol of independence, loyalty and patriotism by the ideologists of enlightenment thought of the Independence Association or Christians.
However, at that time, Gojong's photographs were not easy for the people to get at the newspapers or magazines. They could be attained only through Japanese photo studios or foreigners. In addition, the Chosŏn Government tried to prevent the portraits from becoming commercialized recklessly. Since Gojong acceded to an emperor in 1897 (1897-1910), the government had given an emphasis on royal portraits and tried to maintain the sanctity of the portraits for unifying the nation and strengthening the power of the emperor. Gojong asked the Westerners such as Hubert Vos or Joseph de la Neziere, who came to Chosŏn, to draw his portraits of oil painting, paying them a large sum of money. From Gojong's viewpoint, his image in such works was the one of an emperor pursuing a modern nation. On the contrary, it was the portrait of a falling race to the Westerners.
The fact that Emperor Gojong's portraits were produced using various kinds of new media including photographs and oil paintings shows that the introduction of those new media was mainly led by the government. Furthermore, this also shows that the boundary between traditional arts and modern arts was ambiguous in those days. Especially, as Gojong sought to be a despot and ruler of a modern nation in the period of Daehan Empire, the traditional royal portraits was necessary to strengthen in a sense. Photographs and oil paintings served as means to show royal authority of a civilized nation not simply as new technology or media for reproduction. It might be only after 1910 that traditional royal portrait became an old tradition and realism of photographs or oil paintings became a newly dominant visual method. Therefore, Emperor Gojong's portraits are examples showing complex aspects of a transition period, which are different from both traditional arts of the past and visual arts of the modern colonial era after 1910.
高宗(1852-1919)은 일본, 서양 제국주의의 압력 속에서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어가야했던 전환기의 왕이자 황제였다. 高宗이 통치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는 전통 미술이 지속되는 한편 유화나 사진 같은 새로운 매체들이 도입되면서 전반적인 시각의 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매체를 누구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던 고종은 전통적인 양식의 초상화에서부터 유화, 사진, 삽화, 판화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 중 가장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를 남겼다. 특히 그가 황제로 등극했던 大韓帝國期(1897-1907)는 그의 초상 제작의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상들은 고종의 직접적인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들도 있지만 일본인, 선교사, 개화파 등 그 제작자나 이미지의 유포자가 다른 경우도 많았다. 고종의 초상을 둘러싼 각기 다른 주체들의 다양한 시각들은 그 자체가 근대 시각매체의 유입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논문의 목적은 고종의 초상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시각매체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유입되고, 어떤 기능을 하며 그것이 전통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다.
조선왕조시대 御眞은 先代의 왕을 기념하는 祭儀的 기능을 함과 동시에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政治的 기능을 하였다. 御眞 제작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이 담당했으며 왕과 대신들과의 논의를 거쳐 완성되는 일종의 공동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백성들이 판화나 화첩을 통해 황제의 초상을 사서 볼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의 御眞은 결코 외부에 보여지거나 유포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御眞의 기능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1880년대 부터이다.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처음으로 수교를 한 후 처음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왕의 공식적인 초상을 미국공사에게 전달하였다. 이것은 근대 국가들 간에 통치자의 초상 사진을 교환하는 외교적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이때부터 어진은 제의적 기능과 함께 국가의 표상으로서의 기능도 하게 되는데 이러한 御眞 기능의 변용은 사진의 유입과 초기 대중매체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880년대 사진술의 도입은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한 고종 초기 개화정책의 결과물이었다. 비록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사진술 도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고종의 사진촬영경험은 어진의 기능 변화 뿐 아니라 초상화의 사실적 재현에 대한 시각 역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대에는 일본이나 국내의 대중매체 속에 고종의 초상이 유포됨으로써 국가, 국민의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시각적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전후 일본 니시키에(錦繪) 속의 고종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키기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국내에서는 독립협회나 기독교도들에 의해 자주독립과 忠君愛國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진기술, 망판인쇄술, 대중매체가 발달된 기술복제시대의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하는 것은 1910년 이후부터이다. 즉 고종시대는 19세기 후반 서양이나 일본처럼 군주의 초상사진을 국민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다. 고종의 사진은 신문이나 잡지에 인쇄되어 쉽게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일본인 사진관이나 외국인 등을 통해 ‘구해야하는’ 이미지였다. 뿐 만 아니라 조선정부 측은 왕의 초상이 함부로 상품화되거나 대중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규제하고자 했다. 따라서 1897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대한제국기에 조선정부가 국민통합과 황제권 강화를 위해 택한 방식은 조선왕조의 어진 전통을 강화시키고 어진의 신성성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국내에 들어온 휴벗 보스(Hubert Vos)나 조셉 드 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eziere)같은 서양인들에게 거금을 들여 유화 초상을 주문했다. 이러한 작품들 속의 고종 이미지는 고종의 편에서는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전제군주의 이미지였지만 서양인들의 시각에서는 멸망해가는 種族의 초상이 되었다.
고종의 초상이 전통적 어진으로부터 이러한 새로운 매체들의 실험장이 되었다는 것은 사진이나 유화와 같은 새로운 매체의 도입이 관주도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것은 고종시대에 전통 미술과 근대 미술의 경계가 불명확했던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대한제국기 고종은 전제군주이자 근대 국가의 통치자를 지향했기 때문에 어진 전통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강화의 대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사진이나 유화는 단순히 새로운 재현기술이나 매체가 아니라 문명화된 근대국가의 군주임을 드러내는 수단의 역할을 했다. 전통적인 어진이 지나간 전통이 되고 사진이나 유화의 사실적 재현방식이 지배적인 시각방식이 되는 것은 191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고종의 초상은 과거의 미술 전통과도, 1910년 이후 식민지 근대기의 시각문화와도 다른 전환기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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