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 :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진재처리' 과정을 중심으로 = (The) great Kanto earthquake and policy for Korean in Japan : focused on the process of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b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Chosun government general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7
학위논문사항
발행연도
2007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v, 101 p. : 삽도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임성모
소장기관
본 논문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재일조선인사 안에서 명확히 살펴보기하기 위해, 기존연구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학살 이후의 ‘진재처리’ 과정을 살피고, ‘진재처리’가 관동대지진 이후의 재일조선인 정책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은 일본제국이 안고 있었던 제국 안팎의 위기의식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워싱턴 체제로 인하여 일본제국의 중국진출은 영미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제국 본토와 식민지에서는 각각 과격한 사회혁명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이 발생하여 일본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인 폭동’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자 일본정부가 가지고 있던 위기의식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불안감으로 전환, 학살의 형태로 표출된 것이었다. 학살의 규모가 점차 커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정부는 9월5일부터 학살사건의 수습을 위한 ‘진재처리’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관동대지진 이후의 진재처리는 일본정부만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까지 관여한 양방향에서 이루어졌다.우선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수용소로 모아 일본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메구로(目黒), 나라시노(習志野) 등의 여러 수용소 운영을 중심으로 일본정부의 진재처리는 이루어졌다. 일본정부는 수용소 운영을 통하여 조선인의 이동을 막아 학살 사실이 조선으로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여 식민지 지배질서의 동요를 막는 동시에, 일본민중과 조선인을 격리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인을 학살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일본의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조선인 수용소는 식민통치뿐만 아니라 ‘국내’ 사회질서의 안정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수용소 밖에서는 다양한 선전정책을 통하여 학살사건을 일본제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대외적으로는 학살사건을 ‘조선인 범죄화’시킴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과 식민지 조선으로부터의 항의를 피하려고 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인 노동사역을 ‘조선인의 사회봉사’라고 선전함으로써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화를 이루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내선융화’ 선전정책은 ‘조선인 범죄’라는 인식을 굳힌 상태에서 이루어진 만큼 학살에서 드러났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배제’를 그대로 간직한 채 이루어진 모순된 정책이었다.이와 같이 학살사건이 일본제국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일본정부의 진재처리 역시 일본제국의 대내외적인 요소를 모두 고려한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정부의 수용소는 조선총독부에게 그 업무를 인계하면서 종료하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사이토오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까지 합세하여 일본정부의 진재처리에 적극적으로 합류하였는데, 총독부의 진재처리 사무는 토오쿄오의 조선총독부 출장원사무소(출장소)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출장소에서 이루어진 총독부의 진재처리는 일본정부와 마찬가지로 조선인 수용소 운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총독부가 독자적으로 운영한 수용소로는 니혼바시(日本橋), 아오야마(青山), 코오지마치(麹町) 수용소가 있었다. 이 세 수용소는 각각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조선총독부의 진재처리 사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러한 총독부의 수용소 운영은 총독부 단독의 결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로부터의 업무인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인수과정은 총독부의 적극적인 교섭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총독부는 진재처리를 통하여 기존에 한정되어 있었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활동영역을 넓힘으로써 일본에서의 입지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그런데 조선총독부의 진재처리의 배경에는 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예산삭감에 대한 우려, 그리고 학살사건이 총독부의 통치정책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진재처리를, 3·1운동 때 실추되었던 총독부의 위상을 만회하고 차기년도 조선예산의 삭감을 막는 기회로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진재처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예산에 있어서도 통치방향에 있어서도 성공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재처리를 통한 총독부의 입지확장은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총독부가 재일조선인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재일조선인을 둘러싸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힌 일종의 ‘이중통제’ 상황을 만들었다.일본정부는 진재처리 과정에서 추진했던 ‘내선융화’ 정책을 관동대지진 이후에도 지속시켜 재일조선인 정책의 일환으로 삼았다. 상애회와 내선협화회와 같은 조선인 친일단체를 이용하여 재일조선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추진해 나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 역시 진재처리 이후 내선협화회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상애회에 대한 관여도를 높임으로써 재일조선인 정책에 지속적으로 관여해 나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관동대지진 당시 이루어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진재처리는 이후 마련되는 재일조선인 정책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더보기On 1 September 1923, there was a severe earthquake of 7.9 degrees intensity in Kanto area, Japan. The rumor called 'Korean revolt' was nosed abroad in a state of disorder of the Greate Earthquake so it led to sudden progress of massacre of Koreans in Japan. On 5 September, as the massacre was excessively progressed, the Japanese government begun to 'handle the earthquake disaster' for settlement of that event.In this process not only the Japanese government but also the Chosun government-general(CGG) was participated in the management process of 'handling the earthquake disaster'. In previous studies, it was not considered the fact that the CGG had a part in the policy for Korean residing in Japan and it only acknowledged unilateral notification of order b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passive discharge of the order by the CGG. However as mentioned above, the CGG participated in the process of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thereby having an active role in the policy for Korean in Japan. It was confirmed that there was a certain difference in the approach of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between the Japan government and the CGG.The massacre of Koreans in the time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was the event exhibiting consciousness of internal and external crisis in Japan. In the point which crisis consciousness of the Japanese government was linked to the massacre, the awareness of the Japanese government toward Koreans was acted on. The Japanese government determined the Korean's movement in Japan as a risk factor which might be linked to Japan social revolution, not only national movement. After all, the existence of Koreans in Japan was the being with national- and class-problem for the Japanese government.The Japanese government that settled the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begun to operate a Korean camp. They managed several camps including Meguro and Narasino in the earthquake-stricken district headed by Tokyo. Such Korean camps by the Japanese government considered colonial governing and stabilization of domestic social order. Outside the camp, the Japanese government tried to deal with the event through various propaganda policies in two directions. One was that the massacre was derived from the relation between 'Korean criminal' and 'Japan socialist'. With such policy, they converted the event to social class problem inside Japan, thereby avoiding the blame of the national society including England and U.S.A. and a protest of Chosun. The other was propaganda policies to harmonize Koreans and Japanese. It intended to absorb Koreans excluded as non-Japanese into Japan society again. However, it was performed in the situation of hard consciousness about 'Korean criminal' so the assimilation policy was a contradictory policy including 'exclusion of non-Japanese'.The Japanese government handed over the camp to the CGG to finish it. The reason why they transferred the work to the CGG was in the aspect of acknowledgement of their ability and assignment of work, and at the same time, they should consider the outside effect possible to obtain.The CGG's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was mediated by a branch office of the CGG in Tokyo. It was focused on the operation of Korean camp like the Japanese government. The camps solely operated by the government-general were Nihonbashi (for the forced labor to Koreans), Aoyama (for the repatriation to Chosun) and Koujimachi camps (for Korean students). Therefore the CGG became to extend their domain through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thereby enlarging their location in Japan.In the background of the CGG's work, there was concern about reduction of appropriation due to the great earthquake and crisis consciousness toward the effect of the massacre on the CGG's policy. Though the handling of earthquake disaster the CGG did not only obtain a result more or less in next year budget policy, but also maintain the their governing system not affecting their basic governing condition. The expansion of their position toward Koreans in Japan could be a stepping-stone of that could participate in the policy for Korean in Japan through pro-Japanese association such as Sangaehoi even after the earthquake. This structure created a kind of 'double controlled' situation involving each understanding connection of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CGG around Korean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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