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 통감부의 식민교육정책 연구
저자
발행사항
서울 : 국민대학교 대학원, 2008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국민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한국사(Ⅱ)전공 , 2008. 2
발행연도
2008
작성언어
한국어
DDC
951.0437 판사항(21)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A) study on the colony education policy of the Tonggambu in Daehan jeguk age
형태사항
ix, 256 p. : 삽도 ; 26 cm.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수록
소장기관
This thesis researched the colony education policy of the Tonggambu in Daehan jeguk age. The colony education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was established in Russo-Japanese Wars. But Japanese imperialism´s policy toward the Korea let in objective protected state of korea after First Sino-Japanese War, and then educational policy underwent a change process. At the First Sino-Japanese War, Japanese imperialism interfered in Korean modern time education system, specially The Great Japan foreign Education Development(大日本海外敎育會), Dongadongmunhoe(東亞同文會) or Japanese Buddhism group back which it goes round permeated to Korea positively and it had own way. This did bend over backward in the protecting state Korea,
but When Japanese imperialism lose a Korean undergarment influence base because three country interferences(三國干涉) or Agwan pacheon(俄館播遷),
They founded on Japanese school in the domestic various places of the Korea, taught Japanese and Japanese culture, intend to cultivate of the pro-Japanese group Korean students. Actually, Japanese school takes charge of the many role in Russo-Japanese Wars.
Japanese imperialism suffered from Russo-Japanese Wars, command the colony education policy to draw up educational administration jurat, Sidehara(幣原坦). He researched the colony education actual condition of the Western powers, and then drew up Korean Education Inside improving. This Korean Education Inside improving was the root and the trunk of the Tonggambu's colony education policy. The educational administration jurat's policy was make simple korean education system and studied apanese civilization.
In Tonggambu age, educational administration jurat lawyers a reorganization of the school system in 1906. So They change to four-year elementary school and four-year high school mass produces vocational technician.
Specially, the first generation Supervision Eto-Hirobumi depended to the Japanese teacher and to happen common education the center and it put an importance in production education. He called the model education it.
Eto-Hirobumi prepared in most usual school founding and the operation which will reach it used colonial education public finance with 500000 won. He founded 60 elementary schools and SuWon Agriculture and forestry school and sunlin Commerce school. but he restricts excessively Middle class educational institution' increase.
Actually the students who enter upon studies in the public school were not many. The students of most entered into the private school. So Eto-Hirobumi mobilized a region government authority and the police power back and it exacted attending school of Koreans. And after Japanese vice-minister was nominated, nominated the Japanese civil official with the formal Korean civil official and reformthed school system.
One side, in 1907-8, as soon as Gojong was dethrone and Military force dispersion, Patriotic personages founded the school and cultivate men of talent. Private school rapid increase flaw, Tonggambu clamp down it. As a result, the many school was abolished.
The Korean union policy of 1909 simultaneous should have come to build, tube feeling to see the colony vocational technician whom it blows and it strengthened the bet hazard happening education mass produce plentifully and an unemployment education. With this it joined in and the Japanese studying bookshelf the back happening education boom which is published did lost chance. Also in order to execute an unemployment education in the usual school which it blows. and it transformed the government institution happening school with the business school and it went out.
본고는 대한제국시기에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였던 통감부가 한국을 ‘병합’하기 이전에 실시했던 식민지교육정책을 밝히고자 했다.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이 수립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는 청일전쟁 이후부터 한국을 ‘보호국화’에 목적에 두고 대한정책을 실시했는데, 이에 따라 교육방침이나 정책도 변화과정을 겪었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수립코자 했으며, 특히 대일본해외교육회, 동아동문회 도는 불교단체 등이 적극적으로 한국에 침투하여 교육침략을 자행하였다. 이는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에 일조하고자 하는 바도 있었지만, 일제가 삼국간섭 혹은 아관파천 등으로 한국 내의 세력기반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내 각지에 일어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가르치면서 친일세력을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였다. 실제 이러한 일어학교들은 러일전쟁 당시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식민지교육이 뿌리를 내리게 시작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이다. 일제는 한국의 ‘보호국화’를 내세워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학정참여관 幣原坦으로 하여금 ‘보호교육론’에 알맞은 식민지교육안을 작성, 보고토록 지시했다. 幣原坦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교육실태를 면밀히 연구하여 「한국교육개량안」을 작성하였다. 이는 통감부의 對韓 식민교육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개량안’의 교육방침은 한국의 학제를 ‘卑近’하게 만들고 일본의 문명을 수입, 배양하기 위한 ‘簡易와 利用’의 목적에서 식민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개량안’은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에 각 학교령과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식민교육학제로 법제화되었다. 그 결과 6년제의 소학교는 4년제의 보통학교로, 7년제의 중학교는 4년제의 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단계별로 이뤄진 학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독자적인 목적을 가진, 식민통치에 필요한 기능인을 만드는 학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초대 통감 伊藤博文은 일본인 교원에 의한 일어중심의 보통교육과 식산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伊藤 통감을 이를 ‘모범교육’이라 일컬어 진실을 호도하고자 했다. 먼저 伊藤 통감은 식민통치를 위해 일본 차관 500여 만원을 들여와 그 가운데 10% 해당되는 50만원으로 식민교육 재정을 마련하고 이를 대부분 보통학교 설립과 운영에 사용하였다. 그 결과 4, 5개군의 1개정도인 60여 개의 보통학교가 만들어졌다. 또한 伊藤 통감은 한국의 식민통치 기반 조성을 위한 농업과 상업교육에 관심을 두어 수원 농림학교와 선린상업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伊藤 통감은 ‘근소한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를 많이 양산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중등교육기관 설립을 극히 제한하여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통감부가 ‘모범교육’이라며 적극 선전에 나섰지만, 정작 공립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보통학교를 일본을 위한 학교라며 취학을 거부하여, 1학급당 정원인 50명에 평균 20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伊藤 통감 자신이 구상했던 식민교육정책의 근간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지방 관권과 경찰권 등을 동원하여 한국인들의 취학을 강요하였으며, 지방 유지들로 학무위원제를 구성하도록 하여 취학을 장려토록 했다.
그리고 차관제 설치 이후, 통감부는 일본인 관리를 정식 한국 관리로 임명하고 학부관제를 개정하여 학교행정을 담당하는 학무국과 교과서를 편찬하는 편집국에 일본인들을 집중 배치하였으며, 관공립학교에 교감(학감)직을 신설하여 일본인을 임명하여 실질적으로 학교 행정을 감독하도록 했다. 이로써 식민교육은 한층 강도 높게 실시되었다.
한편, 1907-8년 고종이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등 국권 상실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애국 인사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립학교가 급증하자, 통감부는 식민정책에 방해가 된다며, 이들을 ‘사립학교령’과 교과서 검정제 실시 등으로 철저히 단속, 탄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립학교령’은 학교설립 인가 조건을 갖추면 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계 사립학교를 근본적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통감부는 1909년 사립학교의 재정기반인 ‘기부금 취체’를 단행하였으며, 지방비를 통해 재정 지원을 받도록 규정하게 되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폐교되는 학교가 줄을 잇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사립학교의 교육과정에 간여하면서 ‘병식체조’와 ‘창가’ 등을 적극 규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체 행위를 금지시키고자 했다. 심지어는 수 천명이 모여드는 연합운동회를 집회법을 통해 단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통감부가 이렇듯 강력한 수단으로 사립학교를 통제하고자 한 것은, 공립보통학교의 진학률을 높이고 공립보통학교의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측면도 강하였다. 중앙의 지원만으로 학교를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를 지방재정으로 충당하고자 했으나, 한 개의 군에 수 십개에 달하는 사립학교의 재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자, 이를 차단하고 공립보통학교의 재원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립학교들은 유지단체를 만들거나 학교 간 합병 등을 통해 학교를 유지해 나가고자 했다.
통감부의 취학장려와 사립학교 탄압으로 말미암아 관공립보통학교의 취학 아동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1910년 경에는 입학 경쟁률이 생길 정도로 취학 아동들이 몰려들자, 통감부는 수업료를 징수하여 학교운영에 보태도록 했다.
1909년 일제의 한국 병합방침이 세워지자, 통감부는 식민지 기능인을 보다 많이 양산해 내기 위해 일어교육와 실업교육을 강화하였다. 관공립학교의 각 학교령을 개정하여 ‘處世上 必要? 知識의 增進’을 도모한다며 일어교육을 강화시키자, 사립일어학교들이 곳곳에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일본어학습서가 출판되는 등 일어교육 붐이 일기도 했다.
또한 통감부는 보통학교에 실업교육을 실시토록 하였으며, 보통학교 내에 실업보습학교를 그리고 고등학교와 외국어학교에 토지조사사업요원양성소를 부설하는 등 식민정책에 필요한 기능인을 배출하고자 했다. 특히 한국의 농업을 지배할 목적에서 각 지방에 공·도립농업학교를 설치하였으며, 관립일어학교를 실업학교로 전화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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