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전남지방의 우익단체 연구 = The Study of right-wings group of jeonnam province after Korean liberation
이 논문은 해방 공간 전남지방의 우익 단체에 관한 연구이다. 해방 이후 남한지역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국가건설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한 것은 좌익이었다. 남한의 많은 지역에서 좌익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우익은 변변한 단체조차 만들지 못하였다. 이러한 우익이 해방 3년만에 국가건설을 주도하였다. 우익이 어떻게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지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해방 이후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적극적인 친일을 하였던 많은 수의 우익이 배제되었다. 그 이유는 건준에서의 배척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전력으로 인하여 우익 스스로 몸을 낮추어야 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우익은 미군의 38선이남 진주 이후 본격적으로 세력화되었다. 한민당이 그것이었다. 전남지방에서도 마찬가지이었다. 미군이 진주하였던 10월 이후 우익 정치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미군이 전남지방에 진주했을 때에는 이미 인민위원회가 전남지방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은 도·부·군단위의 행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도군정에 한국인을 참여시켰다. 10월 미군의 광주진주와 더불어 전남지방의 우익은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그 첫 걸음이 각 지방에 결성된 시·도지사고문회의 참여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인들에게 인사 자문을 구함으로써, 군정에 한국인이 참여하고 있음을 남한의 점령민에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즉 미군정에 한국인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미군정의 필요에 우익은 적극 협력하였다.
도지사고문회의 임무는 일본인이 철수하여 생긴 지방행정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한국인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추천하였던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도·군·부 관리로 근무하였던 이들이 많았다. 또한 이들 가운데 한민당원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처럼 도지사고문회가 추천하였던 인물은 일제강점기부터 기득권을 유지하였던 이들이 대다수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지사고문회는 보수우파로 구성되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연구성과물도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군의 보고서와 보수우익이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던 고문회가 좌익 일색이라고 평가했던 것에 대하여, 기왕의 연구에 의하면 설명할 수 없다.
이 논문에서는 기왕의 연구와는 달리 도지사고문회가 보수우파만으로 구성되었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도지사고문회는 우파 가운데 정치색을 띄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보수우파는 소수이었다. 1946년 좌·우의 대립이 심각해진 이후 도지사고문회 구성원 가운데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던 이들은 최종섭, 김양수, 김시중, 이은상, 박준규 등이다. 최종섭은 독촉국민회 전남도지부장을 맡았고, 김양수와 김시중은 한민당에서 활동하였으며, 이은상은 한독당에서 활동하였다. 박준규는 전남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장용태, 강신태, 여철현은 정치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최흥종은 실제적인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7년 말 김종필과 김시중은 민족자주연맹의 위원이었다. 김시중의 경우 1946년 한민당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다 1947년 말 한민당과는 정치 이념이 다른 민자련에서 활동을 하고 있어 정치적인 성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렇듯 도지사고문회는 기왕의 연구 성과에서처럼 보수우파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전남에 도군정이 행정권을 장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전남지방에서 우파의 움직임이 본격화하는데 일조하였다.
우파는 한민당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화에 나섰다. 초기 한민당 전남도당은 소수의 지역유지들에 의해 유지되는 정당이었으나, 1946년 이후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군당조직은 군건국준비위원회 가운데 우익세력이 우위를 점한 지역에서 먼저 결성되었고, 1947년에는 한민당의 전남 도내 군당 결성이 완성되었다. 처음 도당 조직이 결성되었을 때는 각 조직과 책임자만 정해졌는데, 1948년에는 정치위원, 집행위원, 감찰위원 등으로 세분화되어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다. 한민당 전남도당의 구성원은 일제강점기 지주출신으로 고학력자이었고, 직업은 일제강점기의 사업가와 조선총독부 관리, 그리고 미군정의 관리 경험자가 대부분이었다.
한독당 전남도당은 한민당 전남도당에 비해 늦게 결성되었다. 한독당 전남도당 구성원들은 건준에서 활동한 이들이 많았고, 일제강점기의 사업가, 관리 경험자가 한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다만 이들의 학력은 고학력자가 많아 한민당과 비슷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 전남도지부 위원장은 최종섭이었다. 미군정기 3년동안 독촉국민회는 정치적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집회 혹은 언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중앙 독촉국민회의 정치적 입장을 지방에 확산시키는데 일조하였다. 특히 독촉국민회 전남도지부는 이승만의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민족자주연맹 전남도지부는 UN에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어 단독선거가 결정될 무렵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도내 우파 가운데 단독선거 반대자들의 결집체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민자련은 ‘단선반대자는 공산주의자’라는 우익 내부의 공격을 받으며 소수자로 전락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해방공간동안 전남지방에는 많은 청년단체가 결성되었다. 전남지방에서만 결성되었던 조직도 있었고, 전국 조직의 지방 도지부로 결성된 경우도 있었다. 먼저 전남지방의 자생 조직은 해방 직후의 광주청년대와 광주청년단이 있다. 광주청년대는 건준의 치안대와 함께 치안유지와 질서유지 활동을 하다가 미군정 진주 이후 해산되었다. 이후 광주청년단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광주청년대에 비해 우파적인 모습을 띄었다. 이는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좌우 대립 상황에서 이념 선택이 강요되는 당시 시대상황의 반영으로 보인다.
신생청년단은 전남지방에서 결성되었는데, 김구를 추종하였다. 신생청년단이 강조하였던 것은 비폭력이었다. 이것은 좌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폭력이 난무하였던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다른 청년단체와 두드러지는 차별성이었다.
1946년 이후 전국 규모의 청년단체가 서울에서 결성되면서, 전남지방에도 도지부가 결성되었다. 그 첫 단체가 독립촉성청년연맹이었다. 그런데 이 단체는 광주청년단을 흡수·결성되었던 것으로써, 지방의 청년단체가 중앙에 흡수되는 사례이었다. 이처럼 전국규모 청년단체의 결성은 1946년 봄부터 우파의 힘이 전국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서북청년단 전남도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의 구성원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서청은 대좌익투쟁의 선봉대 역할을 수행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부분 중앙에서 파견된 조직원이었던 이들은 독립촉성국민회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약탈과 살인, 파괴, 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즉 지역의 우익 단체의 후원 속에서 서청은 대좌익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족청년단은 순수 청년운동을 표방하고 ‘민족지상·국가지상주의’를 주장하였다. 또한 해방정국에 대두되었던 테러리즘에도 반대하였다. 족청은 1947년 읍·면단위에 이어 지방 행정조직의 기초단위인 里에도 지단부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학생부, 해양부 등을 조직하여 청년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끌어들였으며, 전향한 좌익도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족청은 우익이 전국 방방곡곡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광복청년회는 중경에서 먼저 국내로 파견된 오광선의 광복군 국내지대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광청은 좌익분쇄와 치안유지에 활동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치안유지와 좌익분쇄를 빌미로 지역민에게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미군정의 부담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광청 전남도지부의 임원들은 대부분 한민당이나 독촉국민회에서도 활동하였으며, 이들 우익 단체의 지원 속에서 조직이 성장하였다. 이후 광청은 대동청년단 결성의 주축이 되었다.
대동청년단은 우익 진영 청년단체의 통합으로 결성되었다. 이 단체도 지방의 읍·면단위뿐만 아니라 里에까지 지단부가 결성되었다. 대동청년단은 미군정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으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청전남도단부는 서민호를 중심으로 광청, 서청 등 여러 청년단체의 통합으로 결성되었다. 중앙과 달리 대청전남도단부는 청년단체 통합과정에 갈등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된 대청간부와 전남지방의 대청 간부와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대청전남도단부는 중앙에 종속되기보다는 독자성을 원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해방 직후 미약하였던 우익의 정치적 활동은 미군정의 수립과 함께 점차 강화되었다. 이는 우익 단체들이 미군정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 결과 1947년 하반기 UN에 한반도문제가 상정될 무렵, 우익은 남한에서 확실하게 좌익을 압도하였다.
I'll write about the right wing during the Korean liberation in Jeonnam province in this paper. After the Korean liberation the southern area developed by Korea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nation establishment. Korea Preparatory Committee was led by the left wing. Almost of the southern Korea was led by left wing, so the right wing couldn't build any humble party. But the right wing hold the leadership in three years. I'll write about how the right wing could hold the leadership. Especially focus on the southern area.
U.S army's southward to under the 38th parallel makes the right wing's organization. Jeonnam province was affected this. When the U.S army occupied in Jeonnam province, they gathered the cooperator Korean. And then they made the cooperator take part in the Provincial Government. Provincial Advisory Council was the first step. U.S Military Government wanted to show the participation of Korean by the Provincial Advisory Council futhermore they wanted to remove the Peoples' Committee. After the withdraw of Japanese, there were no administration so Provincial Advisory Council recommend some Korean. So many recommendee were governors under the Japanese colony. Also these recommendee include the HanKook Democratic party members.
The right wing established the HanKook Democratic party and increased in power. Early HonKook Democratic party Jeonnam province league was maintained by the local influential figure, but they increased their power after 1946. The members of a HanKook Democratic party enjoyed a vested rights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most all of these men were elite and they were a business men or governor under the Japanese colonial. Under the U.S military administration, the HonKook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e members became the governor of U.S military administration.
Korean Independence party in Jeonnam province established after the HanKook Democratic party's establishment. There were many Nation Establishment of Preparation's member in Korean Independence Party in Jeonnam province, and there were a fewer governor or business men under Japanese colonial than HanKook Democratic party. They were also elite but their career under Japanese colonial or U.S military administration were a little bit different. National Society for the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NSRRKI) in Jeonnam province president was Choi, Jong Seop. Under the U.S military administration the NSRRKI represented their political opinion at the assembly or the press group for three years. The central NSRRKI's political activity was supported by NSRRKI in Jeonnam province. NSRRKI in Jeonnam province supproted Lee Seng-man's political activity by hold the assembly.
When U.N decided the independence Election in Korea, The National Independence Federation (NIF) in Jeonnam province was organized. NIF in Jeonnam province was consisted of the group that they against the Independence election. But the NIF was pressed by the pro Independence Election. It is said that, "If they were against the Independence Election, they would be a communist." So in the right wing they are minority and they can't influence in the right wing.
During the Korean liberation in Jeonnam province, there were so many youth groups. In some case they were established only in Jeonnam province or they were established in nation wide and stretched in local office. After the Korean Liberation, Gwangju Young Men's Group and Gwangju Young Men's Association were established spontaneously. After that the New Young Men's Group was established only in Jeonnam province.
After 1946 there were established national wide youth group in Seoul and there were established in Jeonnam province, too. The first group was Student Alliance for the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Gwangju Young Men's Group became the Student Alliance for the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at Kwangju. After this many local young men's group were absorbed in central group. So we can understand that the national wide young men's groups were established means the right wing's power became national wide.
And then the Northwest Korean Youth Association (NKYA) in Jeonnam province was established, but it was not so large. Central NKYA dispatched the members to all of the local area and they took part in the frontier of the against the communist.
Korean National Youth Corps (KNYC) insist on the pure youth activity and they claim to racialism and nationalism. They were against the terrorism. KNYC established in yup(邑),meyn(面) and then lee(里). KNYC was the right wing and it established the most fundamental unit. These means the right wing's power reached the most fundamental unit. KNYC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right wing's expansion. KNYC organized the student part and maritime part so they included not only young men but also students. Moreover KNYC included the people of swing to the right.
Kwangbok Young Men's Association (KYMA) claimed to crush communism and maintain public peace and order. KYMA in Jeonnam province staffs acted in HanKook Democratic Party and NSRRKI. The right wing's groups protected the KYMA and it grew rapidly. Later KYMA played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 the United Young Men's party.
United Young Men's Party (UYMP) united the right wing's youth groups. UYMP was led by Seo, Minho, he united the Kwangbok Young Men's Association, Northwest Korean Youth Association and other groups. UYMP also organized the Lee unite local part. These facts showed the right wing held the real power in the very fundamental local unit.
In this paper shows the right wing had been weak after the Korean liberation but the U.S military administration give the power to the right wing. With this power the right wing in the South Korea surpassed the left wing in late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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