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 '국민' 형성론과 통합론 연구
저자
발행사항
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 2010
학위논문사항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ⅲ, 267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최덕수
부록: 『倫理學敎科書』와 『新偏倫理敎科書』 목차 비교 등
참고문헌: p. 25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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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기관
본 논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려 했던 대한제국 지식인들의 노력과 그들의 ‘국민’ 개념 및 인식, 그리고 ‘국민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서구의 ‘네이션’ 개념 및 용어가 일본을 통해 한국지식인들에게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갑오개혁이 실시되기 이전부터 서구의 ‘네이션’ 개념을 수용하기 시작했던 지식인들은 갑오개혁 시기 본격적으로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고자 했다. 이들은 국가구성원들을 ‘인민’, ‘신민’, ‘민’, ‘백성’, ‘국인’, ‘민인’ 등으로 다양하게 호칭했으며, ‘국민’과 ‘민족’이라는 용어 역시 등장했다. 비록 서구 ‘네이션’에 대응하는 용어로 ‘국민’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국가구성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계몽운동기에 들어서였다.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국민상’ 역시 시기별로 변화해 갔다. ‘국민’은 국가구성원이라는 기본적 인식과 함께 이들이 담당해야 할 사회적 역할과 책임은 조선, 대한제국이 처했던 역사적 현실에 따라 변화해 갔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전 시기부터 박영효와 유길준은 ‘국민’을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평등한 존재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대적하기 위해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추진할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비롯한 개혁세력은 갑오개혁을 추진하여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근대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고자 했다. 갑오개혁세력이 교육을 통해 추구했던 ‘국민상’은 군주의 은혜와 보호를 받으며 군주에게 충성하고 국가에 애국해야 하는 ‘신민’으로서 국민’이었다.
독립협회는 갑오정권이 몰락하여 개혁이 중단되고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다시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이루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독립협회는 ‘국민’으로부터 자신들이 추진하던 개혁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개혁을 함께 추진하여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시대적 과제를 함께 수행할 ‘협력자’로 만들고자 했다. 교육과 ‘인민’의 권리를 법률로 보장해 주어 조선인민들을 충군애국심과 같은 국가의식을 지니고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주장했던 ‘인민’의 권리 역시 생명권, 재산권과 같은 천부인권에 국한되었을 뿐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민중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배제된 것이기는 했지만 ‘국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개혁과 입법을 통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주장했던 독립협회가 고종황제로부터 탄압을 받고 해체된 후 한동안 ‘인권’, 또는 ‘민권’에 대한 논의나 활동은 위축되었다. 광무정권은 전제적 황제권을 강화하며 황제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충성하는 ‘신민’을 추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민권운동은 물론 ‘국민’의 권리나 자유에 대한 논의조차 한동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00년 초 청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사건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서 열강의 각축이 심화되고 대한제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도 계속되면서 한국 내에서도 위기의식이 팽배해 갔다. 이 위기를 타개할 주체로서 ‘국민’과 그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세를 굳힌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국민’의 역할과 책임론은 더욱 강조되었다. 국권 침탈이 가속화하자 지식인들은 국가위기의 책임을 ‘국민’에게 묻는 동시에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민’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했다. ‘국민’의 책임과 역할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국가, 정부, 국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서 정부는 주권을 실행하는 기관으로서는 ‘국민’보다 우위에 있지만 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국민’에게는 그 잘못을 바로잡을 권한이 있다고 보았다. 정부보다는 ‘국민’의 책임과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현실적인 이유는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던 한국에서 더 이상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국가, 정부, ‘국민’의 관계에서 국가와 정부의 관계보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는 사회계약론, 또는 국가계약론이었다. 사회계약론을 기반으로 국가는 군주 일인의 사유물이 아닌 ‘국민’ 전체의 공동체라는 논리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일체화하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의한 통감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의 현상이 식민지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언론과 계몽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져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전제적 황제권이 약화되어 감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긴 권력 공백 속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또한 일본이 내세웠던 한국의 ‘문명화’는 한국지식인들 역시 추구하던 목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통감부와 한국지식인들은 모두 교육을 통해 ‘국민’을 형성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국민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으로 부임한 직후 교과서 편찬과 소학교육을 위주로 한 교육, 그리고 실업교육을 통해 한국민을 ‘문명국’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피력했다. 이토가 이러한 교육정책을 통해 형성하고자 한 보호국의 ‘국민상’은 납세와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근대적 가치관과 도덕심을 갖춘 ‘문명국민’이었다. 덧붙여 실업교육을 위주로 한 교육을 통해 식산흥업을 추진할 수 있는 인적자원으로 한국민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통감부는 보호국의 ‘국민’이었던 한국민이 충군애국심, 국가의식을 갖게 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 통감부는 충군애국과 같은 국가사상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추진하던 ‘문명화’에 부응할 수 있는 근대적 인간형을 ‘국민상’으로 추구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국민’은 문명개화한 근대적 인간형일 뿐 아니라 충군애국심과 같은 국가사상을 지니고 국가와 일체감을 형성하며, 국가의 내외주권을 회복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통감부의 ‘국민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국지식인들은 국가구성원들이 ‘국민’으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와 함께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와 자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법률에 의해 권리와 자유를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국권 상실의 위기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사적이익보다는 국익을 중시하고, 국익과 사적이익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국익이 보장될 때에야 사적이익 역시 보호받을 수 있다고 인식했고, 국민’을 국가보다 하위에 두고 ‘민권’보다 ‘국권’을 우선시하는 국가주의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국가주의적 인식 속에서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국민’의 권리는 주로 기본권, 자연권과 같은 개인권에 한정되었으며, 국민권, 즉 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국민’ 참정권 문제는 우선 국가권력의 소재, 즉 주권 문제에서부터 논쟁이 제기되었다. 1905년 ‘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대외적 주권을 상실하고, 1906년 통감부 설치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로 군주통치권으로 대표되었던 대내적 주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주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주권 소재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인민주권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군주주권을 인정하거나 더 나아가 강력한 군주권을 구심점으로 ‘국민’을 통합하려 했다. 이와 같이 군주국체를 주장하는 가운데 ‘국민’은 통치권의 객체 또는 주권의 관할을 받는 자로 통치권과 주권에 복종하고 협력하여 국가를 문명화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존재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권 논쟁과 별개로 1907년 이후 국가주권이 거의 상실된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향후 군주와 황실, 정부, ‘국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또 주권을 대신하여 국가구성원들을 통합해 낼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지식인들은 ‘국민’을 통합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애국심’, ‘애국성’, ‘애국사상’을 강조했고, 입헌정체를 실시하여 법으로 군주의 전횡을 막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위로는 군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국민들까지 모두 일체감을 느끼게 하여 애국사상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국민’의 애국심을 형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헌을 실시할 수도,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도 못하는 ‘보호국’의 현실 상황에서 ‘국민’에게 국가의식과 애국심을 형성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강조했던 것은 자연적 애국심이었다. 즉 애국심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자신이 사는 터전과 가족, 친지들에게 가지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애정 역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자연적 애국심과 國事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때에야 ‘국민’이 국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정치적 애국심 가운데 전자의 애국심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 애국심론은 가족국가론과 함께 혈연공동체로서 ‘국민’과 국가의 관계를 강조하여 ‘국민’ 통합을 도모했다. 한말지식인들은 ‘국민’ 성립의 조건 또는 요소로 공통의 혈연과 공통의 역사, 언어, 습관, 종교 등을 제시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근대국가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국민’을 형성하는 요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근대 종족공동체 또는 혈연공동체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했다. ‘국민’은 이러한 혈연공동체 또는 종족공동체를 이루는 요소들에 덧붙여 정치체 또는 정치공동체의식을 필요로 했다. 종래의 종족공동체 또는 혈연공동체는 근대국가의 ‘국민’을 이루는 근간이 될 수 있었지만 반드시 ‘국민’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말지식인들 역시 ‘국민’과 혈연공동체 또는 종족공동체와의 차이를 ‘국민’과 ‘민족’, 또는 ‘국민’과 ‘족민’으로 구별하여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념상으로는 ‘민족’과 ‘국민’을 구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실제로는 이 두 용어를 혼용했다. 그 이유는 대한제국이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며, 따라서 ‘민족’이 곧 ‘국민’을 이루어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은 일가의 가족구성원과 같이 동일한 조상을 가진 혈연공동체로 인식되었고, 공통의 혈연뿐만 아니라 공통의 역사, 관습, 언어를 매개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존속될 수 있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 역시 가족국가론을 통해 혈연공동체로 설명되었다. 가족국가론은 가족을 최소단위로 하고 그 가족들의 결합체 내지 확대체, 즉 혈연단체의 최상위에 있는 것이 국가라고 정의했다. 가족국가론은 국가구성원들로 하여금 공통의 혈연의식을 바탕으로 강한 일체감과 소속감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점과 사적 영역인 가족과 일가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을 공적 영역인 국가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복종과 의무 이행 역시 이러한 논리를 통해 정당화 되었다. 반면 국가의 기원을 그 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계약에서 찾고 있는 국가계약설의 경우 권력의 원천을 ‘국민’에게서 찾고 있을 뿐 아리나 국가의 역할 역시 그 구성원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국가계약설 역시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국민’의 권리와 자유보다는 국가와 군주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복종, 의무를 우선시 했던 당시의 정황에서 국가계약설은 자칫 ‘국민’의 방종과 무질서를 야기하여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이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국가의 성립을 ‘인민’의 의지와 계약으로 성립했다고 보는 계약설보다는 국가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공동체의 확장 또는 집합체로 인식시켜 국가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족국가론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족국가론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과 같은 혈연공동체로 규정했지만 적어도 정치적 공동체인 대한제국이라는 국가가 유효한 가운데 국가구성원인 ‘국민’이 국가와 황제에 대해 충성하고 복종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1907년 이후 대한제국이라는 현실 국가가 거의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특히 친일내각으로 구성된 정부가 국권을 회복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으며, 군주와 황실 역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에 이용당하여 국권 상실의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가족국가를 구성하던 군주와 황실, 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국가가 와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국민’뿐이었다. 또 혈연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로 인식되었던 ‘국민’은 정치공동체로서 의미가 퇴색되고 혈연공동체이자 정신적 공동체로서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그 호칭 역시 ‘국민’이 아닌 ‘민족’으로 불리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민족’은 공통의 혈연과 역사를 매개로 한 혈연공동체이자 정신공동체로서 단군 이래 한반도에 성립했던 여러 왕조국가의 부침과 무관하게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해 온 실체로 여겨지며,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국가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독립주권국가를 건설하여 그 국가의 ‘신국민’으로 거듭나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지식인들은 당시의 세계를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의 시대로, 또 ‘민족주의’가 극대화하여 타민족의 문화와 생존을 위협하는 “민족적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 시대로 인식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이해하고, 실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민족’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던 한국지식인들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이념적으로 분리하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데올로기로써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민족주의’ 시대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이전까지 국가주권을 대신하여 ‘민족’을 지탱하고 통합할 구심점이자 원동력은 ‘국혼’, ‘국수’, ‘국성’ 등이었다.
‘국민’을 형성, 통합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던 지식인들의 노력과 시도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며 일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지식인들의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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