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전반 窮民救濟土木事業의 대도시 사례와 성격 : 京城ㆍ釜山ㆍ平壤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0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 중앙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한국사 전공 , 2010. 2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한국어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The Cases and Characteristics of 'Gungmingujetomoksaeop(窮民救濟土木事)' of Metropolis in the First Half of 1930s
형태사항
86 p.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장규식
참고문헌 수록
DOI식별코드
소장기관
In 1920s, almost all cities in colonial Korea steadily had grown great Korean population by influx toward urban places from rural areas. This phenomenon happened in metropolitan areas of colonial Korea ; which led to the increase of Gyeongseong (Seoul), Busan and Pyeongyang’s population in outskirts of cities, and were made up of most of people moved from other districts. But because of not being enough industrialized, there were no cities could accommodate people moved from countries. For the reason, most of them became wage earners and lived into a harsh economic life.
On the other hand, with the influence of the Great Depression, Japan imperialist, Hamaguchi(濱口)'s cabinet decided to enforce 'Gungminguje-
tomoksaeop(窮民救濟土木事業),' a civil engineering project for the relief of the poor in Korea, which was a mean to prohibit Korean from moving into Japan. Centered upon flood control and road repairing, this project begun in 1931 supplemented original public works, With its’ connectivity, however, this civil engineering let a number of urban development projects not being started owing to lack of budget realize.
As examples of these projects, there were 'The Repairing Constructions of Suburb Trunk-roads of Gyeongseong (京城郊外幹線道路改修工事),' 'The Constructions and Arrangements of Main-roads, Drawbridge and Berths of Busan (釜山幹線道路渡津橋及船遊整理工事),' and 'The Waterproofing Constructions on The Left Side of Daedong River in Pyeongyang (大同江平壤左岸防水工事).'
At first, the works of Gyeongseong from April, 1931 to April, 1935 were done at four lines; the southern part of the Han River Bridge to Yeongdeungpo station, the boundary line of Gyeongseong to Wangsimni station, the other boundary line of Gyeongseong to Cheongyangri station, and Ahyeon to Mapo. The project was a groundwork for the extension of administrative district in the next few years by improving roads of the this city's outsides where could not apply 'Sigugaejeongsaeop (市區改正事業, which means a urban planning)' of Gyeongseong.
Next, the principal works of Busan from April, 1932 to March, 1935 were to build main-roads and 'Yeongdodaegyo (影島大橋,)' of drawbridge, to straighten exiting berths by the land reclaiming, to make new ones, and to dredge the seeway of Busan Harbor. They came true by receiving government subsidy of eight hundred forty thousand won (圓) for constructing the bridge.
And finally, the constructions of Pyeongyang consisting of embankment work, revetment work, and appurtenant work had been built for four years from 1931 to 1934. The main purpose of them was to protect factories of Japanese-funded companies in 'Seongyori (船橋里),' the left side of Daedong River, from a danger of flood. Also, these were done by supplementing the works named as 'Jikhalhacheongaesugongsa (直轄河川改修工事, which means waterproofing works carried out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the principal rivers of Korea)' of the right side of the river.
When these civil works were delivering, daily laborers in cites coming from an agricultural district and existing in poor became the main supplier of these works. However these emphasized on more weight in surface reason of 'the relief of the poor' than deed in themselves, Not only did these require too much hours to work in comparison with their pay, but these also gave the money below the cost of day living on account of the evils of the subcontract system. This situation is also shown in the case of strike in each construction site of these three cities.
On the other hand, this project mainly was related to the 'Sigajigyehoekryeong (市街地計劃令, which means a urban planning ordinance)' for expanding road network and for securing harbor facilities. Linked to 'The Urban Planning Ordinance', each works of Gyeongseong and Busan was to play roles in shaping the suburb road web of Gyeongseong and connecting thoroughfares of Busan. Each works of Busan and Pyoungyang, meanwhile, had something to do with making the complete 'Busan’s south port (釜山南港)' and a dock for using Daedong River' waterway.
Accordingly, the three works by this civil engineering for relief were mainly focused on erecting the urban transport system. It was necessary for city to change its character. In addition 'Nonggongbyeon-
gjinjeongchaek (農工竝進政策, which means a police that makes agricultural and industrial development together)' by the governor-general, Ugaki Kazushige (宇垣一成), implemented in colonial Korea, Japanese Monopolistic Companies also came into these three cities. It can be confirmed by analyzing the distribution of factories that the areas where these works benefited and new plants built corresponding with a large number of parts.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은 농촌으로부터의 인구유입으로 거의 모든 도시에서 꾸준하게 조선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 경성ㆍ부산ㆍ평양의 인구증가가 주로 도시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거주하는 인구의 과반수이상이 타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도시는 농촌의 이출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산업화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일용노동자로 일하며 겨우 생활을 연명하게 되었다.
한편 1929년 10월 24일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식민지 조선에도 미치고 있던 상황 속에서 하마구치(濱口) 내각은 조선인의 渡日방지를 목적으로 궁민구제토목사업의 실시를 결정하게 되었다. 1931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치수공사와 도로공사를 중심으로 기존에 실시되었던 공사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기존 사업과의 연계성 속에서 궁민구제토목사업은 예산부족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던 도시개발 사업을 대거 실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궁민구제토목사업 중 대도시에서의 대표적인 사례로 경성의 京城郊外幹線道路改修工事, 부산의 釜山幹線道路渡津橋並船遊整理工事, 평양의 平壤大同江左岸防水工事를 들 수 있다.
먼저 경성의 공사는 1931년 4월부터 1935년 4월까지 시행되었다. 공사구간은 한강교남단~영등포역, 경성부계~왕십리역, 경성부계~청량리역, 아현~마포의 4개 노선이었다. 이 사업은 아직 경성부의 시구개정사업을 적용할 수 없었던 府外지역의 도로를 개수하여 향후 2~3년 안에 이루어질 부역확장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1932년 4월부터 1935년 3월까지 진행된 부산의 공사는 간선도로 건설, 도진교 즉 영도대교의 가설, 기존 선착장(船遊)의 정리ㆍ매립과 새로운 정박지의 조성, 항로의 준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 사업은 다리의 공사를 위해 필요하였던 84만圓을 궁민구제토목사업 예산을 통해 국고보조를 받게 되어 실현되었다.
평양의 공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축제공사, 호안공사, 부대공사로 나누어 4년간 진행되었다. 이 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공사가 실시되었던 대동강 좌안 선교리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일본 자본계열 회사의 공장을 홍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공사는 1930년 5월부터 직할하천개수공사의 명목으로 실시되었던 대동강 우안의 방수공사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예산이 배정되어 실시되었다.
이렇게 대도시에서 궁민구제토목사업이 실시되는 경우 1920년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일용노동자들이 주요한 노동공급원이 되었다. 그런데 궁민구제토목사업은 실제로 궁민의 구제보다 이를 명목으로 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임금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노동시간을 요구하고 있었고, 청부제의 폐해로 인해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이 지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성ㆍ부산ㆍ평양의 각 공사장의 파업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대도시에서 실시된 궁민구제토목사업은 크게 시가지계획령과 연계한 도로망 구축, 항만시설확보를 위한 건설사업과 관계가 있었다. 우선 경성과 부산의 궁민구제토목사업은 시가지계획령과 연계하여 경성외곽의 도로망을 형성하고 부산의 주요 간선도로망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부산과 평양에서는 이 사업이 각각 부산 남항의 완전한 구축과 대동강 수운을 이용하기 위한 접안시설의 확충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궁민구제토목사업을 통해 실시된 세 공사는 주로 도시의 교통망 확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통망의 확충은 당시 도시가 공업도시로 성격을 전환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우가키 총독의‘農工竝進政策’이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되면서 경성ㆍ부산ㆍ평양에도 일본 독점자본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는 세 도시의 공장 분포상황을 분석하였을 때, 공사를 통해 혜택을 보는 지역과 새롭게 공장이 들어선 지점이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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