蔚山郡 上北面의 농지개혁 연구 = (A) study of agricultural land reform in Sangbuk-myeon, Ulsan-gun
저자
발행사항
부산 : 부산대학교 대학원, 2010
학위논문사항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한국어
DDC
951.89 판사항(21)
발행국(도시)
부산
형태사항
ix, 333 p. : 삽도 ; 26 cm.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 p.315-329
서지적 각주 수록
DOI식별코드
소장기관
본고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의 사례 연구를 통해 1950년부터 1960년대까지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실시된 농지개혁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의 변동과 토지소유구조 변화의 흐름을 살펴보는 연구이다. 상북면의 농지개혁은 다음과 같은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상북면에서는 농지개혁 이전에 전국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농지 방매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상북의 지주들은 해방 직후 소유농지의 65% 가량을 임의처분 하였다. 그리하여 해방 후 소작지 비율이 63.3%에서 15.9%로 급감하고, 자작지 비율은 36.7%에서 84.1%로 급증하는 방향으로 상북면 토지소유구조가 큰 변동을 보였다. 전국의 경우와 서산군 근흥면, 연기군 남면 지역의 방매 비율이 소작지의 30∼40% 정도였음에 비추어 볼 때, 65%라는 높은 방매율은 상북면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지주의 방매가 실현될 수 있는 좋은 지역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지주가 농민의 소작권을 박탈하여 소작지를 처분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북면의 지주들은 대부분 영세지주였고, 중소지주 이상의 지주라 하더라도 고율의 소작료만 수취하며 소작인과 대립하던 지주의 모습도 아니었다. 소작농민들의 힘이 강하지 않았고, 농민들은 일제시기 이후 대규모 소작쟁의의 경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런 지역 여건 속에서 지주-소작농민 간의 계급적 대립보다는 협력적, 온정적 분위기가 주로 조성되었고, 이것이 상북면에서 폭넓게 진행된 농지 방매의 중요한 배경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연구 가운데 토지대장을 분석한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결과와 마찬가지로 상북면에서 가장 많은 농지가 방매된 해는 농지개혁이 목전에 다가온 1949년이었다. 상북면에서 대다수를 차지한 영세지주들과 5정보 이상을 소유한 27명의 중소지주들은 해방 후 중앙의 정세 변화에 따른 농지개혁 실시 전망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농지개혁법이 기초·공포되던 1949년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적극적으로 농지 처분에 나섰다. 그런데 面內 거주 지주와 面外 거주 지주는 방매 시기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면내 지주와 면외 지주 모두 1949년에 가장 많은 농지를 처분하였지만, 면외 지주들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방매 농지의 약 63%를 처분하여 면내 지주들에 비해 서둘러 방매하였다.
둘째, 농지개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농지의 ‘분배’는 6·25전쟁 발발 이전에 실시되었다. 농지 분배와 농지개혁의 6·25전쟁 이전 실시는 학계에서 일찍부터 논쟁거리가 되어왔지만, 상북면에서는 분명히 6·25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실시되었고 농지도 분배되었다. 아울러 상북면의 농지개혁 시행을 위한 행정적인 준비와 진행 과정은 울산군 당국과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농지개혁 담당자들의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사업 진행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계획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개혁 사업은 진행되었다. 법정기간 내에 지가 상환이 완료되지 못했으나 상환곡 납부는 전국과 비교해서 8.4%포인트 정도 높았고, 지주 보상 신청과 지주 보상금 지불도 지연되긴 했으나, 개혁이 중단되거나 지체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와 같이 비교적 원만하게 농지개혁 사업이 진행된 것은 농민측과 지주측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농지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던 정부의 의지가 그대로 지역 사회에까지 전달되어 작동한 결과이다. 또한 농지를 분배받아 자영농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농민들이 정부의 농지개혁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농지개혁 정책이 상북면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서 지주-농민의 격한 대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을 직접 겪지 않아 농지개혁 사업이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곳이라는 지역적 여건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농지 분배 이후 지주-농민의 관계에서 지주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국가가 장악한 상태에서, 국가가 좌파 세력이나 북한 토지개혁의 영향을 배제하고 농지 분배와 농지대가 상환곡 수납 및 보상, 그리고 소유권 이전 등기 행정을 주도하면서 농민을 지배 관리했던 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상북면의 지주층들은 지주로서의 경제적 배경과 지역 鄕班家 출신이라는 가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일제시기를 이어 해방 후 농지개혁 실시 전까지 지역 유지로서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지주-소작관계를 주도하였다. 이들 지주층들은 일제시기에 면장과 면협의회원 등을 역임하였고, 해방 후는 지역의 교육 관련 운동과 면장, 독촉국민회, 민보단, 대한청년단 등의 사회단체를 주도하며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지속하였다. 또한 지주들은 양반 지주로서의 사회 신분을 유지하면서 지역 공동체의 어른으로서 소작인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처럼 지주들은 소작농민들보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기초하여서도 많은 농지를 방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의 농지개혁은 이러한 상북면 지주들의 존재 양태를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상북면에는 분배농지의 지가를 보상받아 산업자본가로의 전업에 성공한 지주가 거의 없었다. 보상 석수가 100석 이상인 지주는 13명에 불과했고, 해방 직후에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중소지주 27명은 1인 평균 117.1석을 보상받을 정도로 보상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북 최고지주 김석한, 김찬희, 성충갑을 비롯한 상북면 지주들은 미군정기의 방매와 농지개혁을 거치면서 사회적 富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주로 존재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잃었다. 정부가 지주의 토지를 소작농민에게 분배하고 달성하려 했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지주의 산업자본가화’가 아니라 ‘지가증권의 산업자본화’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현상과 마찬가지로 상북면에서도 이처럼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동시에 농지개혁은 상북면 지주들의 경제적 기반과 함께,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지역 유지로서의 정치사회적 기반도 동시에 무너뜨렸다. 지주들은 1950년대에 상북면 지역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몰락해갔다. 반면에 1950년대는 비지주 출신 농민들이 상북면의 정치·사회·경제를 주도하였다. 비지주 출신 농민들은 면장, 면의회의원, 농지위원 등의 직책을 차지하면서 상북면의 지역 정치를 주도하는 신정치지배층으로 부상하였고 토지소유도 점차 확대해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측면에서 1950년대의 상북면 사회는 1950년대 이전 舊사회구조의 연속·이양임과 동시에 이를 지양·단절하면서 새로운 구조로 재편되고 있었다. 그 강도의 면에서 보면 구사회구조의 연속·이양보다는 지양과 단절의 측면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1950년대 상북면 사회를 구사회구조의 지양과 단절을 중심으로 본다면, 상북면에서의 농지개혁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역 사회를 주도해온 지주층의 농촌지배구조가 철저하게 해체되는 계기를 제도적인 측면에서 마련해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주의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소득분배의 개선을 도모하려고 했던 정부의 의도대로, 상북면의 지주들은 지주 경영으로 다시 환원하려는 시도를 거의 추진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하여 갔다. 그리하여 농지개혁은 결국 이전부터 지속되어온 지주제를 지양·단절하고 농사를 짓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는 새로운 토지소유구조를 창출하였다.
넷째, 농지개혁은 해방 직후에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안정적인 중농층으로, 무토지소유 농민을 극영세농에서 빈농층으로 상승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해방 직후에 비해 0.5정보 이하의 빈농층이 73.7% 증가하였고, 0.5∼1.5정보의 중농층이 39.0% 증가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농지개혁 이후 빈농층과 중농층이 소유한 토지가 각각 72.4%와 32.1% 증가한 것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북면의 농지개혁은 토지소유의 측면에서 볼 때, 지주 소유의 토지를 토지 없는 다수의 농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영세 토지소유 농민을 양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상북면의 인구가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상북면 수분배 농민들의 농지개혁 이후 토지소유 면적은 농지가 분배된 직후보다 더 감소하고 있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소유에서 소작인들의 소유로 토지를 이동시켜 지주제를 해체하였고, 농민들이 자작농적 기반을 유지하고 재생산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아준 획기적인 개혁 사업으로 위치한다. 그러나 이후 소유토지의 감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한 정부의 후속 정책이 마련되지 않음으로써 농민들이 안정적 영농 환경을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못하였다. 농업생산력 증진이라는 측면에서도 1960년대 중반까지 긍정적인 기여를 하지 못함으로써 상북면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농촌으로부터 이탈하는 여지를 제공해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상북면의 수분배 농민들은 지주의 농지를 분배받아 자작농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 이후 소유토지가 줄어드는 전반적인 추세 속에서 여전히 빈농층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분배농지를 재매각하거나 농업을 포기하고 離農하기도 하였다. 결국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한국 자본주의체제 건설의 물적 자원으로 쓰였듯이, 이렇게 토지에서 이탈된 농민들은 저임금-저곡가 정책을 바탕으로 구축된 산업화 구조 속에 편입되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This thesis is a case study of the agricultural land reform in Sangbuk-myeon, Ulju-gun, Ulsan city. I examined a landowner's sale of land and a peasant's dealing of land, a fact-finding of farmhouse, the farmland committee, a project of agricultural land reform, the distribution of farmland, the repayment of land prices(the payment of land rents) and compensation for selling land, and a change of political elites and landownership system after land reform, around an agricultural land reform carried out more than 10 years from 1950 to the 1960s. As a result of my study, some features of the agricultural land reform in Sangbuk-myeon are as follows.
First, the sales of farmland in Sangbuk-myeon increased more rapidly than ones in other regions before an agricultural land reform. Landowners of Sangbuk had already sold about 65 percent of their farmland directly after Korea's liberation. In result, there was a great change of landownership system in Sangbuk-myeon. The percentage of a tenanted farmland declined sharply from 63.3% to 15.9%, on the other hand, the percentage of an independent farmland increased rapidly from 36.7% to 84.1%.
This high rate of the sales of farmland was due to a landowner's strong power to deprive of tenancy, a peasant's weak solidarity, and a local condition that peasants had not experienced in a farm tenancy dispute aft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year which sold the most farmlands was 1949 when an agricultural land reform was close at hand. Poor landowners who were in the majority in Sangbuk-myeon and twenty-seven small and medium landowners who owned more than five jeongbo(町步) of farmland weren't able to cope with an agricultural land reform, keeping pace with the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after Korea's Liberation. Therefore, they set out to sell farmland only after a government was established and an agricultural land reform act was enacted and promulgated.
Second, the distribution of farmland, which was most important in an agricultural land reform, had carried out before Korean war. The administrative preparation and the process of a farmland reform was closely connected with the local authorities, Ulsan-gun. Because the persons in charge to reform farmland were not skilled, the project of agricultural land reform would delay but didn't go beyond the scope of what was originally planned. Though land rents couldn't be paid back in the legal period and the application for compensation and the paying of compensation would delay, an agricultural land reform had not been suspended.
The reason why an agricultural land reform went on smoothly was that governmental policy was delivered to local communities well. The government tried to carry out the reform, mediating interests between peasants and landowners. Peasants who looked forward to gaining economic footing by the distribution of farmland responded positively to an agricultural land reform. Also, the local condition that Sangbuk-myeon was not directly drawn into Korean War helped a smooth process of an agricultural land reform.
Third, a landowner of Sangbuk-myeon, an influential man in the local community, who had economic background of a landowner and family background of noble birth had taken greater control of the relationship with peasants from Korean's Liberation to an agricultural land reform. They could sell huge tracts of farmland on the basis of these social backgrounds.
The agricultural land reform had changed their mode of living at once. There were few landowners who succeeded in changing their position into industrial capitalists on the basis of compensation for selling land in Sangbuk-myeon. Landowners of Sangbuk-myeon had lost economic footing, not keeping their property by an agricultural land reform. They also had lost their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 as influential men in the local community on the basis of landownership. On the other hand, those who had not been landowners took the lead in politics, society, and economy of Sangbuk-myeon in the 1950s. They emerged as new political and economic elites of the local community, increasing their land and holding vital local governmental positions such as a head of myeon, a member of myeon Assembly, and a member of land committee.
Thus, the community of Sangbuk-myeon in the 1950s had been reorganized. The agricultural land reform of Sangbuk-myeon served to dissolving the traditional structure dominated by the local landowners who had taken the lead in the local community on the basis of a large farmland. In result, an agricultural land reform changed the old land system for landowners into the new land system for peasants who had farmed directly.
Forth, an agricultural land reform raised a peasant's status, changing a small farmer into a stable middle farmer and a extremely poor farmer into poor farmer. In the aspect of landownership, the agricultural land reform of Sangbuk-myeon distributed farmland of landowners to peasants who had not owned land and created small landowners.
In short, an agricultural land reform dissolved the land system for landowners and made the land system for independent farmers. However, as a decrease in a farmer's land demonstrated, it seems that the agricultural land reform of Sangbuk-myeon failed to promote a stable framing environment because a follow-up policy of the government to improve agricultural productivity was not prepared. It also didn't contribute to improvement in agricultural productivity to the mid-1960s. Therefore, many peasants of Sangbuk-myeon forced to leave their farmland.
Though tenant farmers became independent farmers by receiving landowners' farmland, they still had been poor peasants in the general downward trend in their own farmland. Some peasants resold a distributed farmland and moved from the country into the cities. As an agricultural capital served as material resources to construct the capitalist system of Korea, changing into an industrial capital, peasants leaving their land served as human resources to develop Korean capitalism, incorporated into the industrial structure based on a low-wage and a low-grain price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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