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 소설 연구 : 텍스트 및 작품 세계의 변화 양상 분석을 중심으로
이 논문의 1차적인 목적은 이인직 소설의 텍스트 계보 및 서지에 대한 실증적 고찰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매우 복잡다기한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다중적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 다중성의 관점에 입각하여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의 국면들을 시기 및 텍스트별로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작품 세계 및 작가 의식의 역동적 전개 양상을 재조명하는 것이 이 논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인직의 소설이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할 수 있으며, 이에 비례하여 그 동안 다양하면서도 수많은 연구 결과가 제출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과 관련된 정보들은 결코 정확하게 제공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작품 연구를 위해 가장 기본적인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서지조차도 여전히 불명확한 부분이 적지 않게 남아 있으며, 심지어 틀린 정보들이 여전히 수정되지 않은 채 사실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인직 소설의 종합적인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작업들을 보다 엄밀하면서도 정확하게 수행하고자 하였다.
먼저 일문으로 집필된 이인직의 첫 작품인 <과부의 꿈(寡婦の夢)>은 이인직 소설의 시원적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근대단편소설의 미학적 요소들을 일정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발표된 첫 작품은『만세보』에 연재된 <단편>이 아닌,『국민신보』에 연재된 <백로주강상촌(白鷺洲江上村)>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필사본만이 전할 뿐이지만 본 연구자의 고찰에 의하면 이인직이 창작한 것이 확실하며, 부속국문으로 표기되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 또한 틀림없다.
다음으로 <혈의루>에 대한 서지적 고찰을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을 지칭할 때 그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최소한 5개에 이른다는 점을 알 수 있다.『만세보』연재 텍스트와 1차 개작본인 광학서포본, 그리고 1912년에 대폭 개작되어 발간된 <모란봉>이라는 표제의 동양서원본 등 3개의 상편 텍스트와, 1907년 광학서포본 초판의 발간 직후『제국신문』에 연재된 하편과 동양서원본의 발간 이후 집필된 1913년의『매일신보』연재 <모란봉> 등 2개의 하편 텍스트가 그것이다. 조사 결과 각각의 텍스트는 적지 않은 차이를 노정하고 있었고, 이는 발간 과정에서 매체 전환과 개작 등이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동양서원본의 개작은 이인직 소설의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가장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텍스트로서 주목을 요한다.
이러한 복수의 텍스트 존재 및 텍스트 간 차이의 양상은 <귀의성>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귀의성>의 원문 텍스트는 새로 발굴된 중앙서관 발행 초판을 포함하여 총 4개의 텍스트가 현전한다.『만세보』연재 텍스트와 중앙서관본 상?하편의 초판, 그리고 재판인 동양서원본(상편)이 그것이다. 이 원문 텍스트들을 살펴보면 상편의 경우 중앙서관본은『만세보』연재 텍스트와 일정 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어 사실상의 개작본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동양서원본은 개작의 폭은 크지 않지만 초판에서 발생한 적지 않은 오기들을 상당 부분 바로잡고 있는 개정판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치악산>과 <은세계> 역시『대한신문』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발견된 <은세계> 필사본은 두 작품의 신문 연재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그런데 이 필사본이 동문사본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은세계> 또한『만세보』연재 작품들과 유사한 텍스트 변화의 양상을 지닌 작품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치악산>은 신문 연재 텍스트의 부재로 인해 이 논문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이인직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텍스트 변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서지적 고찰을 통해 이인직의 소설 중 국내에서 발표된 주요 신소설 작품은 예외 없이 신문 연재를 거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체의 전환이라는 계기의 작용과 지속적인 개작 시도로 인해 각 텍스트 간의 차이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인직의 소설은 어느 하나의 판본만을 결정적인 원문 텍스트로 확정하기 어려운 다중성을 내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화 이전, 즉 대한 제국 시기의 텍스트 변화는 작품의 미적 완성도를 향상시키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이는 데 비해 1912년의 개작은 한일합방이라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와 검열 제도의 강화라는 직접적인 압력 요인이 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과 두 시기 사이에는 변화의 성격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특히 이인직의 소설의 가장 중요한 변화의 계기로 지목될 수 있는 사건은 1912년에 이루어진 <혈의루>의 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동양서원본의 개작이 이인직 소설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판단 하에 합방 이전과 이후로 시기를 구분하여 텍스트 및 작품 세계 변화의 양상을 고찰해 보았다.
『만세보』연재 <혈의루>의 특질을 고찰해보면 이 작품 또한 전래의 서사와도 뚜렷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고유의 형식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아가 이러한 소설적 혁신의 추구가 작가 자신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발 작가들의 창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신소설이라는 문학사적 양식의 등장과 정착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혈의루>의 연재는 전래의 서사물들로부터 형성된 소설에 대한 통념을 깨는 새로운 소설, 즉 ‘신소설(新小說)’의 등장을 알리는 가장 분명한 계기적 사건으로 규정될 수 있다. 나아가 최초 연재 당시의 <혈의루>는 혁신적인 서사 문법의 창안을 통해 문학사적 양식의 등장을 견인한 동시에 전근대적이었던 기존 소설 텍스트의 생산?소비?유통 환경과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만세보』연재 <혈의루>는 단행본화 과정을 거치면서 적지 않은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양상은 기본적으로는 개작을 통한 문장 표현상의 심미적 완성도 향상이라는 목표 의식의 추구로 요약될 수 있지만 그러한 목표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거나 일관되게 추구되었다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측면 또한 존재한다. 이 외에도 우연적이고 외부적인 요인 즉 매체 전환의 물리적인 과정에서 발생한 교열상의 오기로 인해 애초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의 변화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결국 단행본 출판은 이인직 소설의 텍스트에 일정한 다중성을 형성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한 제국 시기의 이인직 소설의 텍스트 변화 유형은 크게 교열상의 오기와 개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확실한 오기로 판단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원문 텍스트 자체에서도 작가가 의도했던 작품의 본래적인 모습에 적지 않은 훼손이 가해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고찰 결과 정확도만을 기준으로 할 때에는 대체로『만세보』연재 텍스트의 신뢰도가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되었던 개작 부분을 포함하여 이인직 소설 전반에 걸친 개작의 양상을 작품별로 고찰한 결과 해당 사례들은 이인직이 어휘 및 문장 층위를 넘어 단락 층위에서도 광범위하면서도 대폭적인 형태로 개작에 임하였음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대체로 서술 분량이 감소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문장 및 표현을 간결하게 다듬음으로써 수사적인 세련미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작 시도는 주로 수사적인 측면에 집중되고 있으며 서사의 구조나 주제면에 있어 변화를 초래하는 수준에서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축약 서술 경향은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표현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신문 연재 텍스트가 확보했던 장점을 반감시키는 쪽으로 귀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사실에 부합되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한일합방 이후의 2차 개작본인 동양서원본 <혈의루>는 대한 제국 시기의 텍스트에 담지 되어 있던 정치적 주제 의식이 거세되는 방향으로 주요 장면의 삭제 및 대체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총독부의 검열에 의한 삭제의 강요라는 직접적인 영향과 함께 식민 지배 체제의 성립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현실의 변화에 맞춰 작품의 구성을 변경하려는 작가의 내적인 의도도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양서원본에서는 언뜻 보기에 검열 압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개작의 특징들 즉 장식적 수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고유어 표현을 이용하여 문장의 세련미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포착된다. 이러한 개작의 경향성은 검열로 인해 정치적 담론의 표명이 봉쇄당한 현실에 대한 보상 심리의 발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대한 제국 시기의 텍스트를 개작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취해 오던 태도가 일관된 결과로도 볼 수도 있다.
한일합방 이후『매일신보』에 연재된 <모란봉>에 이르러서는 복고적 서사 문법으로의 회귀 및 통속화 현상이 보다 두드러지게 노정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고유의 창작의 원칙 혹은 방법론을 일정 부분 견지하고자 노력하기도 했고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작품의 개신(改新)보다는 굴절 및 퇴행적 변형으로 귀결된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외적 요인들의 작용으로 인해 주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작품의 정치성이 탈각되는 한편 예술적 완성도를 향한 작가의 추구는 보다 엄격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법적 세련미의 추구 과정에서도 그것이 반드시 참신성을 내포한 혁신의 차원으로 고양되지만은 않았다. 이는 고소설의 서사 문법으로의 회귀 현상이나 고소설의 관용적 어구들을 이용한 장식적 수사의 확대 현상을 통해 확인된다.
요컨대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이인직 소설에 미친 영향 또한 매우 엄중한 것이었으며 자신이 창안하고 형성해 낸 혁신성을 유지하기 위한 작가의 내적 노력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성취의 전반적인 퇴색과 작가적 역량의 퇴행이라는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결국 이인직의 소설은 내외적 요인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인해 끊임없는 자가 발전과 굴절의 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된 다중적 텍스트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은 <혈의루>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이인직 소설의 전반적인 변화 과정을 원전비평의 방법론과 통시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이인직 소설의 내적 변화의 과정 및 그 양상에 대한 고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주로 <혈의루>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그의 작품 전반에 걸친 변화의 과정을 통시적인 관점에서 조망한 종합적인 검토 작업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근대소설사에서 이인직의 소설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보다 명확히 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이 이 논문이 추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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