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記類編』의 編刊과 毁板ㆍ火書에 관한 연구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1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석사)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문헌정보학과 , 2011. 8
발행연도
2011
작성언어
한국어
DDC
020 판사항(22)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A) study on the compilation and publication of Yegi Yupyeon, and the printing block destruction and book burning of Yegi Yupyeon
형태사항
vii, 119 p. : 삽도 ; 30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신승운.
부록: 1. 崔錫鼎 家系, 2. 崔錫鼎 年譜, 3. 『禮記類編』 관련 기사 정리 [외] 수록.
참고문헌: p. 98-102.
DOI식별코드
소장기관
In this paper, I researched an effect of ideological and political factor on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books through Yegi Yupyeon(禮記類編) compiled by Choi Sukjeong(崔錫鼎 1646~1715), who was a prime minister and a scholar in the latter part of the Chosun Dynasty.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work are as follows.
1. Choi Sukjeong succeeded to the academic heritage of his family, which was passed down from his great-grandfather of Choi Ginam(崔起南), who was a student of Wugye(牛溪) Sung Hon(成渾), a famous Neo-Confucian scholar in 16th century. Choi Sukjeong was also taught by Nam Guman(南九萬), who was a leader of Soron(少論) that had a academic root mainly from Sung Hon. It means that Choi Sukjeong was a member of the school of Wugye that had a relatively flexible and eclectic traditions. Yegi Yupyeon was an book produced by Choi Sukjeong's academic ardor under the traditions of the school of Wugye.
2. Choi Sukjeong begun to study on Liji(禮記) around in the winter of 1680, started compiling Yegi Yupyeon in 1683 and completed it from 1692 to April 1693 in Hwanghwabang(皇華坊) Seoul. Yegi Yupyeon Daejeon(禮記類編大全), the second edition of Yegi Yupyeon, has a list of names of persons who were involved in the compilation of Yegi Yupyeon in the end of the book. The list was divided into five categories, 'Ganghwak(講確)' which means consultation, 'Chamjeong(參訂)' which means editorial review, 'Pyeongyo(編校)' which means compilation and correction, 'Seonsa(繕寫)' which means transcription and 'Gojun(考準)' which means comparison of transcripts.
3. Yegi Yupyeon has been published twice by order of King Sukjong(肅宗). The first edition was published around in November 1700 in Gyoseogwan(校書館) using Musinja(戊申字) that was a metal type, which was carried out on Choi Sukjeong' proposal to King Sukjong in the royal academic council held in October 4th 1700. The second edition was published in February 1707 in Yeongnam provincial government office(嶺南監營) using wooden printing blocks.
4. Choi Sukjeong grouped Liji chapters into seven sections by the contents in Yegi Yupyeon, the etiquette of a family(家禮), the etiquette of a nation(邦國禮), the etiquette of a education(學禮), the etiquette of a memorial service(吉禮), the etiquette of a funeral(凶禮), the etiquette of a happy event(嘉禮) and the etiquette of a reception(賓禮). Seven sections of Yegi Yupyeon were based on the editing system of Yili Jingzhuan Tongjie(儀禮經傳通解). He also restored Zhongyong(中庸) and Daxue(大學) to Yegi Yupyeon, which had been extracted from Liji by Neo-Confucian scholar of Song(宋), and inserted Xiaojing(孝經) to Yegi Yupyeon with his own understanding that the contents of Xiaojing are similar to Liji. In addition, he put his opinions in order and made them annotation on Yegi Yupyeon to make up for the fault made by Chen Hao(陳澔) in Liji Jishuo(禮記集說). Especially, he reorganized the paragraphs of Liji. That was performed not only within a chapter but also among chapters mutually. This is an unique editing way that has not been found in any other books dealing with Liji in Korean history except Yegi Yupyeon.
5. Lee Gwanmyong(李觀命) who was one of Noron(老論) bureaucrats officially raised the problem of Yegi Yupyeon to King Sukjong in January 1709 for the first time. He insisted that Choi Sukjeong defamed the authority of the Confucian classic and the majesty of the sage with Yegi Yupyeon. But, the proposal to republish Yegi Yupyeon was submitted by Gwon Sangyu(權尙游) in 1701, who was a student of Song Siyeol(宋時烈) and a younger brother of Gwon Sangha(權尙夏). It was nearly ten years since Yegi Yupyeon had been published when Lee Gwanmyong brought up the problem of Yegi Yupyeon. It means that Noron already knew Yegi Yupyeon very well ten years ago and they didn't consider Yegi Yupyeon as a trouble for a decade. Accordingly, we can make assumption that there were certain political purposes in Noron's attacking on Yegi Yupyeon.
6. In January 1710, Choi Sukjeong was dismissed from the Head Officer of Medical Agency for Royal Family(藥院 都提調) by King Sukjong all of a sudden on the grounds that Choi Sukjeong had neglected his duty of nursing King Sukjong. Choi Sukjeong seriously lost the trust of King Sukjong through that case, finally resigning from the prime minister. Then Noron raised the problem of Yegi Yupyeon to King Sukjong in March 1709 once again, asking King Sukjong for the printing block destruction and book burning of Yegi Yupyeon. Their demand was accepted soon. By doing so, King Sukjong gained an actual profit in state management, Noron justified themselves.
7. The book burning of Yegi Yupyeon was carried out after the printing block destruction of Yegi Yupyeon by Ministry of Rites(禮曹). Royal Secretariat(承政院) took a charge of gathering and transportation of books. The book burning of Yegi Yupyeon finished in July 1710, because it took several months to gather books distributed throughout the nation. The total books burned aggregated 1,045 at that time.
8. The printing block destruction and book burning of Yegi Yupyeon occurred after the book burning of Sabyeonrok(思辨錄) made the learning and thought of the latter part of the Chosun Dynasty increasingly immersed in Neo-Confucian of Zhu Xi(朱熹). Consequently, gradual disappearing of diversity and flexibility in academia brought about an obstruction to the publication of various books. The fact that Yegi Yupyeon or any similar book wasn't published anymore after the printing blocks destruction and book burning of Yegi Yupyeon supports the theory.
본 논문은 崔錫鼎이 지은 󰡔禮記類編󰡕의 編刊과 毁板ㆍ火書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다. 󰡔禮記類編󰡕를 통해 조선 후기의 사상적ㆍ정치적 요인이 文獻의 出版과 流通에 굴절되어 나타난 현상의 일면을 구체적으로 밝히려고 하였다.
Ⅱ장에서는 최석정의 생애 전반과 학문, 저술에 대해 다루었다. 崔錫鼎은 牛溪 成渾의 門人인 崔起南의 증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崔鳴吉의 손자로 태어나 家學을 계승했으며, 밖으로는 少論의 領袖이자 대표적인 학자인 南九萬을 스승으로 삼아 안팎으로 牛溪學派의 學風을 계승하였다. 그는 정치가이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는데, 특히 經學에 대한 연구에 평생 힘을 쏟아서 九經에 대한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陽明學, 音韻學, 天文學, 數學, 字學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Ⅲ장에서는 󰡔禮記類編󰡕의 편찬 과정과 간행 경위, 편찬 체제에 대해 다루었다. 󰡔禮記類編󰡕은 최석정의 九經에 대한 연구 결과로서 생산된 일련의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최석정이 󰡔禮記類編󰡕의 편찬을 염두에 두고 󰡔禮記󰡕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부친 崔後尙의 喪을 당했던 1680년 겨울 무렵이고, 본격적으로 편찬을 시작한 것은 1683년이다. 여러 번 原稿를 바꿀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1692년부터 1693년 4월 사이 서울 皇華坊에 머물고 있을 무렵에 󰡔禮記類編󰡕을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편찬 과정에서 少論의 學者들에게서 諮問ㆍ監修를 받았는데, 중간본인 󰡔禮記類編大全󰡕의 卷尾에 수록된 人名錄에 각각 ‘講確’과 ‘參訂’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편집과 교정을 담당한 ‘編校’, 稿本의 筆寫를 담당한 ‘繕寫’, 傳寫本을 原本과 맞추어 보는 작업인 ‘考準’이 기록되어 있는데, 編校는 최석정의 문인과 집안의 子弟들이 담당하였고, 繕寫는 寫字官들이 주로 담당하였으며, 고준은 讀書堂의 胥吏들이 담당하였다.
󰡔禮記類編󰡕은 1700년과 1707년에 두 차례 간행되었다. 初刊本은 1700년 10월 4일의 經筵에서 최석정이 숙종에게 올린 건의에 따라 그해 11월경에 校書館에서 戊申字로 인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禮記󰡕의 正文과 최석정의 附註만 수록되어 있는 18권의 󰡔禮記類編󰡕이다. 重刊本은 1701년 7월 24일 弘文館에서 陳澔의 集說을 삽입하여 再編하도록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1707년 2월 嶺南監營에서 木板으로 간행되었는데, 초간본을 바탕으로 正文의 단락을 나누고 해당 단락마다 陳澔의 集說과 최석정의 附註를 달아 재편하였다. 이것이 바로 40권으로 재편된 󰡔禮記類編大全󰡕이다.
󰡔禮記類編󰡕 편집 체제의 특징은 󰡔儀禮經傳通解󰡕의 7部 체제를 모방하여 󰡔禮記󰡕의 편목을 家禮, 邦國禮, 學禮, 吉禮, 凶禮, 嘉禮, 賓禮의 7部로 나누어 각 편을 내용에 따라 배속시키고, 󰡔禮記󰡕에서 빠져 있던 「中庸」과 「大學」을 󰡔儀禮經傳通解󰡕의 체례에 의거하여 다시 넣었으며, 󰡔孝經󰡕도 󰡔禮記󰡕와 같은 종류의 글이라고 판단하여 󰡔禮記類編󰡕 속에 편입하였다. 또한 자신이 연구하여 터득한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여 각 편마다 附註로 달아 陳澔의 󰡔禮記集說󰡕에서 오류나 미비점을 바로잡거나 보완하였다. 최석정은 經文의 내용 중에 뒤섞이고 빠진 부분이 많다고 보았으므로, 자신의 연구한 바에 따라 단락의 위치를 바꾸어 재편한 것이 많았다. 본편의 내에서 단락의 위치를 옮겼을 뿐만 아니라, 다른 편과 통합하여 다른 편의 단락을 옮기기도 하였다.
Ⅳ장에서는 毁板ㆍ火書가 발생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禮記類編󰡕의 문제가 제기된 원인과 전개 과정, 毁板ㆍ火書가 결정되고 시행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張禧嬪이 賜死된 이후 張氏一家의 처벌과 世子의 보호를 둘러싸고 老論과 少論의 대립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발생한 林溥와 李潛의 獄事에서 최석정이 鞫問을 담당하였는데, 노론은 이 옥사를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았으므로 더욱 최석정을 견제하게 되었다. 1705년 이후로 최석정은 숙종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의 지위를 독점하고 있었고, 정치의 주도권도 소론이 점차 장악하고 있었다. 노론은 최석정을 제거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禮記類編󰡕이 처음 간행되어 본격적으로 유포된 것은 1701년 무렵이다. 1709년 1월 25일에 李廷謙이 올린 상소를 보면, 책이 처음 간행되었을 때에 젊은 선비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01년 7월에는 전년에 간행한 󰡔禮記類編󰡕이 正文만 수록하고 陳澔가 편찬한 󰡔禮記集說󰡕 중의 集說을 수록하지 않아 열람에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弘文館 副修撰 權尙游와 校理 尹趾仁이 再編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모두 노론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보면, 󰡔禮記類編󰡕에 대해 처음부터 약간의 논란은 있었지만 노론에서도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政局의 爭點으로 떠오른 것은 간행된 지 무려 9년이 경과한 시점인 1709년이었다. 더구나 1707년에 再編되어 木板으로 重刊까지 된 상황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禮記類編󰡕의 문제가 불거진 것이 학문적, 사상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1709년 1월 18일에 李觀命이 󰡔禮記類編󰡕에 수록되어 있는 󰡔大學󰡕과 󰡔中庸󰡕이 朱熹의 章句와 다른 것과, 󰡔大學󰡕과 󰡔中庸󰡕을 󰡔禮記󰡕에 다시 편입한 것과, 󰡔禮記󰡕에 없던 󰡔孝經󰡕을 편입한 것 등을 문제로 제기하며, 이것은 經書를 훼손하고 聖賢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몰아 붙였다. 최석정은 우리나라 先正인 李彦迪, 李珥 및 程朱의 학설과 󰡔儀禮經傳通解󰡕의 체례를 따른 것이니 만큼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해명하였으며, 숙종도 최석정의 해명을 적극 지지하고 이관명의 행위를 偏黨의 결과로 치부하여 免職시켰다. 이후로 최석정이 󰡔禮記類編󰡕을 지어 경서를 훼손하고 성현을 모욕하였으므로 毁板ㆍ火書해야 한다는 상소가 조정의 안팎에서 빗발쳤다. 그럼에도 숙종은 최석정을 영의정에 계속 발탁하여 신뢰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1710년 1월에 병을 앓고 있던 숙종이 병간호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都提調로 있던 최석정을 削奪官爵하고 門外黜送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명령은 곧 정지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최석정은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숙종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때를 틈탄 老論은 󰡔禮記類編󰡕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여 3월 13일에 毁板ㆍ火書의 명령이 내리도록 하였다. 숙종의 입장에서는 소론의 領袖인 최석정을 영의정에서 파직하고 門外黜送까지 한 마당에 앞으로의 원활한 국정의 운영을 위하여 노론의 집요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최석정을 확실하게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파직보다 강경한 처벌이 필요했을 것이며, 지금까지 최석정을 공격하는 명분이었던 󰡔禮記類編󰡕의 毁板ㆍ火書를 관철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했다는 것을 세상에 천명하였던 것이다. 󰡔禮記類編󰡕의 毁板ㆍ火書는 숙종과 노론 서로에게 實利와 名分을 살리는 조치였던 것이다.
毁板이 먼저 시행되었고, 火書를 어느 官署에서 주관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란이 있었으나, 이전에 󰡔思辨錄󰡕과 󰡔國朝詩刪󰡕의 사례에 따라 禮曹에서 주관하였다. 승정원에서는 궁중에 보관되어 있던 책과 각지에 頒賜된 책을 수집하여 예조로 이송하는 일을 맡았다. 지방에 반사된 책을 수거하는데 시일이 소요되어 7월에 이르러서야 火書가 완료되었는데, 당시에 火書된 󰡔禮記類編󰡕이 총 1,045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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