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노비의 삶과 의식세계 : 『묵재일기』를 중심으로 = Lives and the World of Consciousness of the Slaves in the 16th century : Centered on the Diary of Muk-Jae (默齋日記)
본 연구는 默齋 李文楗(1494~1567)이 1537년부터 1567년까지 약 32년에 걸쳐 기술한 『默齋日記』를 통해 ‘16세기 奴婢의 삶과 의식세계’를 고찰하고, 이로써 조선시대 가장 하층 계급인 노비 역시 자신의 문화, 즉 믿음, 가치, 행동의 그물망을 통해 삶을 위해 최선의 전략을 구사한 주체적 인간이었음을 확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논문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Ⅱ장 출생과 죽음에서는 노비의 出産과 育兒 과정을 비롯하여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喪·葬禮에 관해 살펴보았다. 노비는 賣買·贈與·相續의 대상으로 奴主에게 있어 물적 재산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지만, 이들 역시 자녀를 낳아 건강하게 기르고자 최대한 노력하였다. 노주에게 있어 소유비의 출산은 노비의 확대재생산을 의미하였기에, 이들은 출산과 산후조리 과정에서 노주의 특별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출산 이후 비들은 어린 상전의 유모나 젖어미가 되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아이는 영양 부족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고된 사환에 동원되는 노비들은 상대적으로 자녀를 돌보는 일에 소홀하였고, 질병에 대한 적절한 의료 조치 역시 노주의 배려를 통해서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노비의 자녀 양육은 영양 상태, 육아에 대한 관심, 구료 등의 측면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고, 이는 노비 자녀의 영·유아사망률을 높이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醫療體系가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兩班의 경우에도 적절한 시기에 약을 복용하거나 藥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미약했던 노비들의 경우, 제대로 된 의료 조치를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노주들은 소유노비의 건강 상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들에게 기본적 구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다. 질병의 치료에는 服藥뿐만 아니라 침이나 뜸 등 의료적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밖에 다양한 민간요법과 치병굿 등 주술적 방식이 함께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厄이나 鬼神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에 거처를 옮겨 액을 피하는 避接이나 귀신을 쫓는 逐鬼 등을 통해 병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질병을 두려워하고 이를 피하고자 하는 관념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 사람들은 가급적 죽음을 멀리함으로써 액을 피하고자 하였고, 이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밖으로 옮기고 외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죽음을 맞아 크게 哭하는 행위는 亡者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표현으로 인식되었고, 곡의 강도는 곧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곡소리는 주변에 發喪의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때로 정상적 죽음의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절차가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이후 고향에 安葬되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바람은 草葬의 장례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초장은 屍身을 땅에 묻지 않고 두었다가 肉脫한 다음 뼈만 매장하는 전통 장례법이다. 이는 망자의 사망 이후 本葬까지 어느 정도 시한을 확보할 수 있는 장례 형식으로, 망자의 가족들은 이 기간 동안 타지에 거주하는 가족에게 사망 소식을 전하거나 장례에 소용되는 경제적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타지에서 사망한 이들은 초장 이후 다시 본장을 치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옮겨 묻힐 수 있었다.
장례에는 많은 물력과 인력이 소용되었고, 따라서 공동체의 相互扶助는 매우 중시되었다. 喪을 당한 사람들은 공동체의 부조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洞隣契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호부조는 노비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적용되었는데, 공동체의 소속원은 身分이 아닌 동일 지역에서의 거주와 거주 기간, 거주의 지속성, 상호부조의 경험 축적, 일상적 접촉을 통한 교류 등을 통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祖上에 대한 숭배와 魂靈에 대한 두려움, 망자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였고, 이는 祭儀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당시에서는 유교적 제사뿐만 아니라 佛敎나 전통적 민간신앙에 따른 다양한 제례 형식이 공존하였는데, 이는 때로 병행되거나 상호습합 되었다. 노비들은 매년 秋夕에 부모에 대한 제사를 올렸고, 때로 망자의 묘에서 墓祭를 지내거나 巫女의 주관으로 七七齋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칠칠재는 불교의 四十九齋 형식과 무녀가 행한 굿의 형식으로 각각 행해졌고, 이는 불교와 전통 민간신앙의 습합을 잘 보여준다. 한편 노비들 중에는 부모의 忌日에 忌日祭를 지내는 경우가 확인되는데, 이들은 주로 乳母나 유모의 자녀 등 노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노비들이었다. 전통적 방식의 節日祭를 지내는 노비들과 달리, 일부 노비들은 절일제와 유교적 기일제를 병행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민간신앙과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들은 占卜이나 액막이를 통해 미리 액을 피하고자 했고, 이 같은 인식은 질병에까지 확대·적용되었다. 액막이는 무녀를 통한 굿판의 형식에서부터 개인이 직접 행하는 비손이나 푸닥거리까지 다양하게 행해졌다. 민간신앙에 따른 각종 무속 행위는 노비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제Ⅲ장 혼인관계와 가족에서는 노비의 혼인관계와 혼인 생활을 살펴보고, 당시 몰락 양인층이 행한 投託과 良賤交婚의 혼인관계를 살펴보았다.
노비들은 기본적으로 독자적 삶을 누리기를 희망하였고, 노주에게 직접 使喚되는 일은 가급적 원하지 않았다. 노주들 역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노비에게 원하지 않는 家內使喚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에 노주들은 가내사환을 선택하는 노비들에게 사환의 반대급부로 의·식·주의 제공 등 다양한 혜택뿐만 아니라 婚姻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노비의 혼인에는 노주의 의지가 일정 정도 반영되었는데, 노주는 자신의 婢가 良人 男性이나 타인 소유노와 혼인할 것을 기대한 반면, 奴는 良女와 혼인시키고자 하였다. 양천교혼을 금한 조선국가의 입장과 달리, 노주는 婢夫·奴妻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所生을 자신의 소유노비로 확보할 수 있는 양천교혼을 선호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들은 혼인대상의 폭이 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았고, 主家에서 가내사환 할 경우 남노가 노주의 소유비와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즉 경제적 기반이 열악한 노들에게 있어 가내사환은 보다 안정된 삶의 유지와 혼인의 기회로 다가왔다. 이처럼 노비들의 가내사환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하나의 삶의 전략이었다.
性別 勞動依存度가 높았던 전근대사회에서 혼인을 통해 배우자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이후 자녀를 낳아 가족 노동력을 확대하는 일은 생계유지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혼인관계를 통해 경제공동체를 형성한 노비 부부는 노주의 눈을 속이고 中間橫領 등을 통해 自己經理를 확보하는 일에 부부가 함께 힘을 모았다. 이들은 혼인생활 중 배우자 이외의 대상과 通奸하는 등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성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러한 통간 행위는 남편과 아내 양측 모두에게서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혼인 생활이 유지되는 동안의 통간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들은 혼전 성관계와 棄別, 再婚 등에 있어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배우자에 대해 충실함을 지녀야 한다는 관념은 부모 세대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통간을 저지른 사위의 행동에 대해 장모가 그 잘못을 비난하는 모습은 이러한 관념이 부모 세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노비의 통간 행위에 대한 노주들은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문건은 양반조차 쉽사리 제어하지 못하는 欲情을 노비들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며, 노비들의 통간을 별스럽지 않게 받아들였다. 이는 노비들이 혼인과 성에 관해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지배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누락되었음을 보여준다.
노비 부부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며 자녀를 낳고 경제공동체로서의 상호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결합의 강도는 매우 느슨했다. 이들은 통간을 통해 혼인생활의 불만족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통간 행위가 곧 혼인관계의 파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혼인관계 파기의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건강, 배우자에 대한 불만족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중 가장 실질적 이유는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들은 자신의 생계 안정을 위해 棄妻·棄夫를 결정하였다. 한편 노비들은 혼인관계의 유지와 棄別에 관한 자기결정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였다. 이들의 혼인에는 노주의 뜻이 일정 정도 작용되었지만, 혼인관계의 유지까지를 노주가 강제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원하지 않는 혼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새로운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혼인관계를 통한 삶의 전략적 구사는 양천교혼을 선택한 양인층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16세기 조선 사회는 농민층 몰락이 급속도로 진행된 시기로, 이들 몰락 양인층은 각종 國役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양반·권세가로의 투탁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들 투탁인은 비록 양반·권세가에 자신의 삶을 의탁한 존재였으나, 이는 일시적 선택일 뿐 이후 자신이 삶을 독자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자신을 받아들인 許接人에게 노동력 제공의 반대급부로 의·식·주와 구료 등을 제공받았고, 때로 자신의 친인척에 대한 完護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든지 투탁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이후에도 양인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투탁을 받아들인 양반·권세가에서는 이들을 자신의 소유노비와 혼인관계를 맺도록 종용하고, 이후 從賤의 慣行에 따라 그 소생을 자신의 소유노비로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양천교혼을 통해 확보한 이들 비부·노처의 혼인관계는 불안정했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奴夫·婢妻를 얻어 생활하였지만, 일정 정도 생활 기반이 마련되면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영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자유로운 삶을 위한 이들의 생존전략은 배우자의 주가에 대한 눈속임, 도망, 기부·기처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즉 당시 활발히 진행된 투탁과 양천교혼은 몰락 양민층이 구사한 다양한 생존전략 중 하나였다.
제Ⅳ장 일상생활과 생존전략에서는 노비의 일상생활과 사환에 관해 살펴보고, 乳母 乭今과 婢夫 突邁의 사례를 통해 노비들이 행한 다양한 삶의 전략·전술을 살펴보았다. 우선 유모 돌금의 사례를 통해, 16세기 노비 신분의 여성이 삶의 질곡에서 어떤 판단과 결정들을 내리면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끌어 갔는지 살펴보았다.
돌금은 報恩에 거주하는 三月의 딸로, 남편 夜札과의 사이에서 아들 億卜과 遺腹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문건가의 妻邊奴婢로, 고향인 報恩에는 어미 三月과 乭石, 石根, 加知 등 형제들이 거주하였다. 이문건의 성주 유배 이후 남편 야찰은 성주 이문건가에서 가내사환 되었고, 돌금은 보은에 머물렀다. 이문건은 돌금을 불러 가내사환 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녀는 노주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런 돌금의 고집은 남편 야찰과의 棄別을 각오할 만큼 강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출산 이후 돌금은 유모의 역할을 받아들이면서 이문건가에서 직접 사환되었다.
이처럼 가내사환을 거부하던 돌금이 사환을 결심한 까닭은 아마도 그녀가 유모의 역할을 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사대부가문의 유모는 緦麻의 服을 논할 정도로 특별한 존재로 인정되었고, 이는 유모의 배우자와 그 소생에게도 적용되었다. 유모 가족은 노주의 財産分財 때 分散·分財하지 않고 가족 단위로 분재되도록 배려되었고, 유모의 자식들은 때로 文字를 解得하는 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기도 했다. 당시 시묘살이 하는 노비들은 그 노고를 포상하는 의미에서 免賤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는데, 유모의 자식은 우선적으로 이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모의 자식들은 어미젖을 충분히 먹지 못한 채 영양 부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유모가 되는 일은 때로 자식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게다가 유모에게는 다른 노비들과 달리 양반사대부가문의 유모로서 적합한 행동 양식과 도덕적 기준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들은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양반들의 생활양식을 몸소 실천하면서 다른 노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유모가 이러한 양반사대부가의 규범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따른 것은 아니었다.
돌금은 남편 야찰과의 사별 이후 이문건가의 婢夫 終年과 또 다른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돌금과 종년은 모두 배우자가 사망한 상태였기에 이들의 결합은 재혼에 해당되었지만, 이문건은 이를 통간으로 간주하며 비부 종년을 집에서 내쫓았다. 한편, 이문건의 아내 안동 김씨는 종년과 헤어질 수 없다는 돌금을 간신히 설득해, 결국 이들의 혼인관계를 파기시켰다. 하지만 이후 돌금은 노주의 눈을 속인 채 몰래 종년과의 혼인관계를 유지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노비들 역시 노주의 눈을 속이고 이들을 도와 함께 공모하였다. 이처럼 유모의 경우 유모로서의 특별한 행동 규범과 도덕성이 요구되었지만, 이들은 이를 스스로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유모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녀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자유로운 삶의 일부를 저당 잡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자신의 자녀에게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돌금은 이처럼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수많은 선택에서 자기의지를 가지고, 때로 순종하고 때로 반항하면서 자신의 삶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비부 돌매의 삶은 또 다른 삶의 전략·전술을 보여준다. 혼인을 통해 배우자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자녀를 낳아 가족 노동력을 확대하는 일은 노비 가족이 안정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는 가족 구성원의 性別, 경제적 상태, 노동 조건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변화되었다. 게다가 노비 가족은 노주의 財産相續이나 賣買 등을 이유로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는 불안정한 존재였다. 따라서 가족을 이룬 노비들은 자녀가 성장하여 身貢을 부담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최대한의 안정을 이루어야 했다.
돌매 가족은 부모와 자녀 세대로 이루어진 單婚小家族의 가족 형태로, 돌매는 자신의 병작지뿐만 아니라 아들들 몫의 병작지를 새롭게 얻으며 농업 경영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 자녀들이 장성하여 身貢을 부담해야 할 때가 오자, 돌매는 우선 딸들을 노주에게 보내 직접 사환시킴으로써 딸들 몫의 신공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돌매는 이후 아들들을 혼인시킴으로 부족한 여성 노동력을 메웠는데, 이때 돌매의 아들들은 모두 양녀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돌매 가족은 부모 가족과 몇몇의 자녀 가족으로 구성되는 複合大家族으로 가족 형태가 변화되었다.
이러한 돌매 가족의 가족 형태는 이후 자녀 가족의 새로운 出産과 分家 등을 통해, 다시 단혼소가족의 형태로 변화의 길을 걷도록 노정되어 있었다. 장성한 자녀 가족의 독립은 이후 부모 가족의 노동력 공백을 가져왔고, 부모 가족은 가족 규모의 축소로 인해 단혼소가족을 유지하다가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돌매 가족은 아들들의 혼인 이후 일정 기간 복합대가족의 가족 형태를 유지하다가, 아들 가족의 새로운 출산과 분가를 통해 점차적으로 분화·해체되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돌매 가족의 경우, 돌매와 군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급작스러운 가족의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 같은 돌매 가족의 삶에 대한 미시적 관찰은 돌매의 삶과 관련하여 각각의 선택과 그 내적 동인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돌매 자신은 비처와의 혼인관계를 선택하고, 이후 비처의 주가 소유 토지를 안정적으로 병작함으로써 일정 정도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돌매는 이 같은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자녀들을 모두 노비의 신분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돌매는 자신이 이룬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노비의 신분인 아들들을 양녀와 혼인관계를 맺도록 했다. 이러한 비부 돌매의 선택은 一賤則賤의 慣行에 의한 16세기 노비 인구의 비약적 확대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되었다. 비부 돌매의 경우처럼 양천교혼을 선택한 당시의 수많은 가난한 양인들은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이러한 선택이 결국 노비 인구의 비약적 증가라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제Ⅴ장 정체성과 저항에서는 노비의 自己認識 형성 과정과 노주의 노비 관리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어 노비들이 노주와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순응과 저항을 다양한 모습을 통해, 노비들이 일상에서 행한 불복종의 의미에 관해 살펴보았다.
노비들은 어린 시절부터 노비로서의 적절한 행동 양식을 체화하도록 교육받았지만, 이들이 노주의 의지대로 충직한 노비의 역할만을 배워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노주에 대항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 역시 스스로 배워나갔다. 이들은 노주의 부당한 처우에 맞서 반항하거나 저항하는 과정을 통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노비들과 同類意識을 나누기도 했다. 노비들은 동료를 감싸주기 위해 일부러 노주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동료를 대신하여 노주의 체벌을 받기도 했다. 한편 이들은 노주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 怪談을 만들어 유포시키면서, 다른 노비들과 이를 함께 즐기기도 했다. 이러한 괴담의 유포는 노비들이 행한 저항 행동의 하나로, 이들은 항간에 떠도는 각종 풍문에 자신들만의 해석을 덧붙여 노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처럼 노비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관한 불만을 함께 나누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노주들은 노비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 마음을 얻고 위엄을 가하여 제재하되 그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을 노비를 잘 부리는 요체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노비와의 관계에서 恩威竝行을 모범적 노비 통제의 방법으로 보았다. 이에 노주들은 노비로서의 이상적 모습을 보이는 존재를 忠奴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포상을 통해 다른 노비들을 교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노비에게 이상적 노비의 모습은 노주에게 최선을 다하는 충노가 아닌, 노주가 가장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頑奴의 모습이었다. 결국 노주들은 소유노비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 체벌 이외의 노비 제어 방식을 다양하게 강구해야 했다.
노비들은 자신의 소유주뿐만 아니라 노주의 친인척이나 친지 등을 찾아다니며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이들과의 인간적 정분을 나누기도 했지만, 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들 역시 존재하였다. 노비들은 노주를 대신하여 이들에게 완호를 받고자 했고, 노주들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거나 들어주었다. 이는 노비소유주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노비 공동 관리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노주들은 자신의 노비뿐만 아니라 친인척이나 친지의 소유노비까지 기록·관리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를 통해 노비의 자발적 現身을 유도하였다. 노비들은 자신의 소식이나 가족의 근황을 알기 위해서 노주나 노주의 친인척, 친지 등을 찾아가야 했고, 이는 노비소유주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노비 통제와 관리의 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노주의 노비 관리와 통제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性別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담당 역할이나 소유권 역시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다. 노비들은 소유주에 대한 사환을 그 배우자나 타인의 명령보다 우선시 했고, 자신의 소유주가 아닌 타인을 통해 사환될 때에는 명령을 제대로 들으려하지 않았다. 특히 독립적으로 거주하는 노비들의 경우, 이들을 관리·통제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이에 노주들은 신공 납부 때만이라도 노비들이 직접 현신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매번 다양한 핑계를 대며 노주를 찾아오지 않으려 했다.
이처럼 노비들을 적절히 제어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결국 체벌을 통한 노비 제어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체벌은 노비 도망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등 실제 노비들은 체벌로 통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제 이들에게 내려지는 체벌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이는 노주 역시 노비들을 매로써 제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노주들은 체벌 이외에 다양한 노비제어의 방식을 강구해야 했다. 노주들은 노비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을 일정 정도 제어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노비 통제를 행하였고, 소유노비의 친인척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노비들을 제어하였다.
노비들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아닌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기를 희망하였고, 이러한 이들의 의지는 노비 저항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노비들은 노주에게 적극 대항하기보다 소극적으로 반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소소한 말대꾸에서 기물 파손, 怠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노비의 소소한 반항 역시 노비 저항의 한 형태로 파악된다. 노비들은 간접적으로 노주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였고, 때로 逃亡이라는 보다 적극적 방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희망하였다.
This study intended to examine the lives and the world of consciousness of the salves in the 16th century through the 'Diary of Muk-Jae (黙齋日記)' written by Muk-Jae Mun-Geon Lee (1494~1567) over about 32 years from 1537 to 1567. Korean men in old times had pseudonyms such as Ja (字) and Ho (號). The Ja (字) and Ho (號) of Mun-Geok Lee were Ja-Bal (子發) and Muk-Jae·Hue-Su (默齋·休叟) respectively. His father was Yun-Tak Lee (李允濯) who served in the position of Jeongja (正字) in Seungmunwon (承文院), a national office in charge of diplomatic documents and his mother was a daughter of Hwe Sin (申澮) in a family of the Koryeong Sins (高靈申氏). In 1514 (the eighth year rein of Jungjong), he passed Samasi (司馬試), a civil service examination, but was suspended from taking a civil service examination for nine years as Gimyosahwa (己卯士禍) occurred by associating him with the massacre of scholars. In 1528 (the 23th year reign of Jungjong), he passed the examination Byeolshimugwa (別試文科) and was appointed to the position of Juseo (注書) in Seunjeongwon (承政院). Thereafter, he took the positions of Baksa (博士) in Seungmunwon (承文院) and Jeongeon (正言) in Saganwon (司諫院), and then rose to the position of Dongbueungji (同副承旨).
In 1545, as his nephew Hwi Lee (李煇) suffered a reverse from Elsasahwa (乙巳士禍), he was also exiled to Seungju (星州), the hometown of his family's progenitor. In 1567, he ended his life in the place of exile without release. 'The Diary of Muk-Jae' is a dairy written about his daily lives and a total record of 17 years and eight months is preserved. The contents of the diary are largely divided into three parts; Geowoo-Ilgi (居憂日記) that contains his life of mourning at the graves of his parents from November 1535 to January 1537, Sahwan-Ilgi (仕宦日記) that describes his public service life for about seven months, and Yoobae-Ilgi (流配日記) that shows his exile life from September 1545. In 1998,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published the Diary of Muk-Jae in a total of ten volumes as 'The Diary of Muk-Jae I and II' after writing the original book clearly in the square style.
The major contents of this thesis are as follows. In Chapter 2. Birth and Death, this paper examined the birth and child rearing process of the slaves in the 16th century, their perception of death, and funeral rites. As pregnancy is not a disease, but a natural phenomenon, pregnant servants in those times were not treated with special care. However, the childbirth of slaves meant an expanded reproduction of their owners' fortunes. As a result, the pregnant slaves could receive special care from their owners during the course of childbirth and postnatal care. Meanwhile, the slave owners not only provided their slaves with basic food, clothing and shelter, but also had to actively seek their treatments when they became sick. Occasionally, the slaves who could not sustain a living any longer due to an old age and sickness relied on their owners for the rest of their lives on behalf of their families, and when they passed away, the owners helped to hold funerals. In the premodern society in which medicine was underdeveloped, diseases were a fearful existence that could threaten not only the life of patients itself, but also the poor livelihood of their family members. However, in the times when a medical system was not properly established, even 'yangban (兩班)', a class of noble birth, found it difficult to take medicines timely or obtain medicines. In such circumstances, the slaves whose economic power was relatively weaker could hardly receive suitable medical treatments. However, the slave owners paid a lot of attention to the health conditions of their own servants and made spontaneous efforts to seek treatments.
Patients in those times attempted to cure their diseases not only through taking medicines, but also through folk beliefs or witchcraft. They also tried to overcome diseases in the manner of recuperating in a relocated place away from home. Basically, people in those times intended to end their lives within their family community, and therefore, a person's death outside his/her community was recognized as dying in a foreign land. However, the slave owners were reluctant to face the death of their servants within their houses. Therefore, the slaves had to build a quarantine camp outside and die away from home. Meanwhile, the slaves also hoped to be buried in their hometown after death and performed various ancestral rites after the deaths of their parents or spouse.
In Chapter 3. Marital Relationship and Family, the marital relationships and families of the slaves were examined. Basically, those slaves wished to have an independent life and were not willing to serve an owner directly. The slave owners also could not force the unwilling slaves to become their household servants as they could run away anytime if they intended. Thus, the slave owners provided the slaves who chose to be their household servants with various benefits iin return for their service, which included food, clothing, and shelter, as well as the opportunity to get married. For the slave owners, the marriage and childbirth of their servants were regarded as highly important in terms of an expanded reproduction of their slave pool. The owners expected their female servants to marry a 'yangin' (良人, the class of commoners) man of or a slave owned by another owner. Meanwhile, the owners of males servants wanted to marry them to a yangin woman.
Unlike the policy of the Joseon Dynasty, which bans 'yangcheongyohon' (良賤交婚), the marriage between a yangin and a slave, the slave owners preferred such a marriage in the light that they could secure workforce through bibu (婢夫), a yangin man becoming the husband of a slave woman, or nocheo (奴妻), a yangin woman becoming the wife of a slave man. Moreover, they preferred yangcheongyohon as they could secure the children from such a marriage as their own slaves. As shown by this, the male slaves had a relatively smaller range of marriage candidates compared with female slaves, and if they work as household servants, they were given more chances of getting married to a female slave owned by their owners. In other words, for economically poor slaves, the position as a household servant became an opportunity to maintain a more stable life and get married. This suggests that the position of a household servant was one of the life strategies that the slaves inevitably opted for in a given environment.
Marriage was a basic element to lay a more stable living foundation. In the premodern society in which the labor dependency between men and women was comparatively high, it was highly difficult for men to make a living without female labor or for women to earn a living without male labor. As a result, the slaves built a close mutual cooperative relationship as a economic community by getting married and having children, and they were highly active in securing economic self-management. The salves maintained relatively liberal sexual relations such as committing adultery with the women other than their spouse during a marital life. However, such adulterous acts did not appear to have had an direct impact on the annulment of marriage. The acts of adultery were committed by the both sides of husband and wives. The slave owners were relatively generous about such acts. However, even among the slaves, adulterous acts while maintaining a marital relationship became a target of criticism, and the concept of being faithful to one's spouse in a marital relationship exited. In other words, although they were relatively liberal in terms of pre-marital sexual relations, separation, and remarriage, they still held an expectation about their spouse's loyalty during the marriage. While a slave's marriage was influenced by the intent of his/her owner to a certain extent, the owner could not force the sustenance of the marriage. The owners also did not want their servants to continue an unwanted marital relationship. The slaves terminated an unwanted marital relationship according to their own will or created a new marital relationship through remarriage.
In those times, meanwhile, the class of yangin also employed a marriage-based survival strategy. People in the yangin class temporarily depended on yangban or powerful families in order to sustain a living or avoid military or other labor services, and those accepted yangin people were encouraged to marry slaves. Yangban and powerful families could secure labor force by accommodating them whin their households and additionally sought an expanded reproduction of their slaves through the marriages with the slaves owned by them.
In Chapter 4. Daily Life and Survival Strategy, the daily lives of the slaves and the survival strategies of their families were examined. Before marriage, the slaves were provided with food, clothing, and shelter in their owners' houses and lived together with the same-gender slaves. They occasionally fought with their fellow slaves when they did not want to live together with some fellows. In a typical household with servants, the meals for the servants were provided by the female servants in charge of cooking. They were given three meals per day in busy farming seasons and two meals per day in slack farming seasons. At times, they went on strike for the reason of insufficient meal portions. Clothing was also supplied by the owner's household. Most of the clothes were old ones which the owner's family members had worn. Besides, for shoes or hats, they occasionally purchased at the stores of leather craftsmen or markets. The slaves who got married lived in a family unit and possessed a certain level of privately owned property and use them personally.
For the slaves, securing the labor of their spouse and expanding the labor force of their family through marriage was an essential condition for them to make a stable living. However, the forms of slave families changed according to a variety of variables such as the genders of family members, economic conditions, and labor conditions. Besides, the slave families were an unstable existence that could be disintegrated anytime according to their owners' secession of property or trading. Therefore, the salves who formed a family had to stabilize their livelihood to the fullest over a short period until their children grew and they had to pay shingong (身貢), the children's body charge to be paid instead of the children's physical labor for their owner. When the slaves reached the time to pay shingong, they attempted to release the financial burden by selectively sending their children to the owner as direct servant according to their agricultural management types. Meanwhile, the salves who secured a certain level of economic power tried to lower their financial burden in the manner of reducing the burden of their spouse's shingong through the marriage arrangement of yangcheongyohon.
In chapter 5. Identity and Resistance, self-recognition and resistance of the slaves were observed. While the slaves were educated to have the behavioral patterns as a slave from their childhood, they didn't simply play the role of being loyal to their owners and acting according the owners' will. They not only learned the behavioral patterns as a slave, but also self-learned the ways to resist and protect themselves from the owners. Through the process of rebelling or resisting against the unfair treatments of their owners, the slaves shared the consciousness of kind with their fellow slaves, and tried to resolve the complaints against the owners in various methods. Those slaves occasionally lied to their owners in order to shield their fellows. During this process, they were at times punished physically by the owners on behalf of the fellows. At times, the slaves enjoyed together making and spreading a story that an evil owner ended up paying for his own sin, and remedied their grievances by sharing the complaints about their position. However, the slaves and owners were not always in a conflicting relationship. The slaves sometimes felt a sense of intimacy with their owners in the course of living together with the owners over a long period, and thereby, performed a faithful role of a slave according to the owners' will.
Meanwhile, the owners controlled their slaves in the manner of eunwibyeonghaeng (恩威竝行), which means acting in both grace and dignity. In other words, they protected their slaves by being considerate and offering various benefits, but strictly punished for their wrongs. The owners intended to control their slaves through proper corporal punishment, but at the same, provided various benefits to ward off their rebellion and resistance.
When the slaves were oppressed by the palace or other people, they went to their owners or the people in the yangban class, whom they had an acquaintance with, and asked for help. Occasionally, they also went to their owners to hear how their family members away from them were doing. The owners protected not only their own slaves, but also the slaves under their relatives and close friends through wanho (完護), a national rule to protect the life or safety of a certain class. Such acts of protection were realized at the level of communal slave management among the slave owners. The communal slave management worked as one of the slave control tactics along with the sharing and division of property in slave families as a method for property succession.
However, the slaves hoped to live as a free being, not an object of control and management, and such a will was expressed in the various forms of slave rebellion. They expressed their complains indirectly to the owners through strikes or minor disobediences, or sometimes wished to live an independent life through a more aggressive way of e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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